대한민국임시정부5 독립을 향한 안창호의 열망과 리더십 1. 임시정부를 위한 안창호의 노력 임시정부의 대표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는 새로운 대안을 추진했다. 전 국민의 의견을 결집해 독립운동의 방략을 고쳐 세우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한 것.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의 역할을 하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도산은 더 큰 규모의 국민 의지를 모을 수 있는 국민대표 회의를 통해 임시정부를 보강하고자 했다. 남의 나라 땅에 모여 조국의 운명을 의논하는 일은 산 넘어 산이었고, 비용 마련과 교통 문제 등으로 네 번이나 연기되며 2년의 준비기간을 가진 끝에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다. 민족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국내 13도 대표들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멕시코까지 국내외를 대표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라 안팎 135.. 2022. 11. 26. 안창호의 노력과 임시정부의 위기 1.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 "우리의 혁명은 민족혁명이외다!" 1919년 3·1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마침내 독립운동을 전개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해 5월 25일 상해를 찾았다. 1842년 난징조약 결과 일찍 개항한 상해는 그 무렵 중국의 경제 중심지이자 아시아 최고의 자유 무역항으로 성장해 있었다. 열강들이 설치한 조계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조계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산 안창호가 도착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 청사는 안창호가 미주 교포들에게 모금해 온 자금으로 마련됐고, 곧 정부의 외형을 갖추었다. 3·1운동 이후 억눌렸던 민족의 욕구가 다시 끓어오르자 국내·외 .. 2022. 11. 26.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임시정부 1. 광복을 위한 군대 창설 1938년, 일제는 쉬저우, 정저우 점령에 성공했다. 임시정부는 다시 피난길에 올라 광저우에 도착했다. 1938년 가을, 우한의 대공중학교에선 1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이 모여 항일무장을 조직했다. 대장 김원봉을 필두로 조선의용군 조직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1938년 광저우에서 류저우에 도착해 1938년 12월 광복진선 청년공작대 조직했고, 1939년 4월 유주에서 구이양을 거쳐 치장에 도착했다. 이동은 중국 정부가 도와주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 전선과 민족전선으로 구분돼있는 양 진영에 통일을 종용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좌우합작 성명서였다. 이 성명서엔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으로 서명했다. 그리고 3개월 뒤 치장현에서는 양 진영의 7단체가 모여 7당 회의를 열었으나 2.. 2022. 11. 20.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연합 1. 국민대표회의의 소집과 결렬 1920년 10월,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인솔하는 연합독립군이 백두 산록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 토벌군을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무장 독립을 주장하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승리였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상하이로 와 6개월에 불과했지만 임시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수행함. 임시정부 외교의 첫 수확이 3년 만에 광저우에서 있었다. 중국 호법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이다. (임시정부 특사 신규식) 하지만 1921년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분란과 대립이 생겼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측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던지 새 정부를 만들자며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2개의 파로 나뉘었다. .. 2022. 11. 20.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