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복을 위한 군대 창설
1938년, 일제는 쉬저우, 정저우 점령에 성공했다. 임시정부는 다시 피난길에 올라 광저우에 도착했다.
1938년 가을, 우한의 대공중학교에선 1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이 모여 항일무장을 조직했다. 대장 김원봉을 필두로 조선의용군 조직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1938년 광저우에서 류저우에 도착해 1938년 12월 광복진선 청년공작대 조직했고, 1939년 4월 유주에서 구이양을 거쳐 치장에 도착했다. 이동은 중국 정부가 도와주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 전선과 민족전선으로 구분돼있는 양 진영에 통일을 종용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좌우합작 성명서였다. 이 성명서엔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으로 서명했다. 그리고 3개월 뒤 치장현에서는 양 진영의 7단체가 모여 7당 회의를 열었으나 2당이 불참하여 실패로 끝이 났다.
1939년 11월, 충칭에서는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창설되었다. 지대장은 나월한이 맡았다.
1940년 4월, 이동녕이 치장에서 사망했다. 임시정부의 큰형이었던 이동녕의 유언은 임시정부 산하의 정당들만이라도 통합하라는 것이었다.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은 한국독립당의 이름으로 통합했고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뽑았다.
명실공히 임시정부를 대표하게 된 김구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실력자들을 만나 광복군을 신설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장제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수많은 한국인이 1939년 일본 탄광, 공사장으로 강제 징용됐고, 1940년 일본식 성명 강요 등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됐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다시 충칭으로 이전. 한국광복군 창설했다.
시안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듬해 1월, 대원 200여명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초기 광복부대의 주력부대가 됐다.
충칭은 육상접근이 어려운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일본군은 오직 공중에서만 공격해 방공호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 다음날 9일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26개국 연합국이 형성되었다. 이후 일본은 파죽지세로 동남아를 점령했다.
충칭에는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고, 1941년 봄 작전지역으로 가는 바람에 충칭에 남은 의용군 대원은 많지 않았다.
시안에 나가 있던 광복군 총사령부가 42년 9월 다시 충칭으로 옮겨왔다. 중국 군사위원회로부터 자신들의 지휘권 아래에 있으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임시정부 승인을 외면한 미국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임시정부로써도 광복군의 전열을 재정비, 강화하는 데는 충칭사령부가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광복군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자주권 회복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김구는 중국 정부에 그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다.
한국 독립운동계가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 의회를 구성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민족혁명당의 좌파 인사들이 의정원 의원에 뽑혔다. 주변 정세도 시시각각 변했다. 연합군의 핵심인 미군의 승승장구 소식은 한국의 임시정부를 힘껏 고무했다. 지체 없이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중국 장제스는 미국 루스벨트에게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에 지원하는 금액이 높아진 것도 이쯤이었다. 장제스는 국제사회에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국내정세는 국제와는 아예 딴판이었다. 전격적으로 학병제를 실시한 일제 군부는 1944년 1월 수천 명의 한국 대학생들을 전선으로 끌고 갔다.
마침내 한국 독립운동계가 망명 세력 전체가 참여하는 임시정부를 구상하게 되었다. 연립정부의 형태를 갖추고 주석의 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으로 임시헌법 개정했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통일 정부를 이루어 대내, 외 위상을 높이게 됐고 일제의 패망으로 항복할 때까지 이 정부를 유지했다.
국무위원과 각 부서장은 당에서 고루 뽑았다. 쉬저우. 1944년 2월, 한국인 학병들이 이곳에 일본군 부대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부터 이들 중 상당수가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이 되었다. 국내에선 한국의 젊은 여성 10만여명이 전선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현지 위안부로 희생되었다.
충칭시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1945년, 연합군은 일본이 점령했던 땅들을 탈환했다. 대일첩보전에 한국광복군을 투입하는 작전을 논의했고, 독수리 작전 - 한국광복군을 한반도와 일본에 투입하여 유격 작전을 수행한다는 미국 OSS의 작전계획을 세웠다. OSS 훈련계획은 임시정부의 보고됐고 승인되었다. 중국의 장제스도 이 계획을 지지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항복했고 6월 21일 미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그리고 8월 7일, 광복군을 대표한 김구와 미군을 대표한 소장 도너번이 만나 한미 특전작전회의를 선언했다.
3. 일본의 무조건 항복
8월 6일과 8월 9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26년 4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1945년 9월 2일, 해방된 이 땅에 38선이 그어졌다. 김구의 우려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임시정부는 서둘러 당면정책 발표했다.
당면정책 내용 - 새 정부는 독립국 민주 정부 균등 사유를 원칙으로 해야 하며 과도정권이 설 때까지 임시정부를 유지한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38선 이남에서 미군정(9.9)을 실시했고, 망명정부를 주권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했고 평생 이날만을 위해 때로는 혈혈단신으로, 때로는 대가족을 이끌고 중국을 떠돌며 27년 망명정부를 지탱해온 지사들에게 미군정 당국의 결정은 분노와 통한이었다.
임시정부는 중국에 남아 정부의 잔무를 처리하고 광복군과 교민들의 귀국을 돕도록 주화대표단을 구성했다. 임시정부가 중국을 떠나게 되자 중국 공산당이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성대한 송별회를 열었다. 김구와 장제스는 그간의 노고를 서로 위로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귀국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침내 서울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당국자 이외에 고국의 동포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임시정부는 환국 26일 만에 비로소 동포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강대국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3천만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27년간의 위업과 노고를 기꺼이 인정했다.
해를 넘기고 46년 1월 임시정부의 대가족이 귀국길에 올랐다. 10만 대군의 광복군을 만들어 귀국하고자 했던 이청천(지청천) 대장의 포부도 미군정 당국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리고 3년 뒤, 온 겨레를 죄인으로 만드는 청천벽력의 비보가 이 당을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49년 6월 26일 다시 1년 뒤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해방 조국에서 일어났다.
백범어록 중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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