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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3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임시정부 1. 광복을 위한 군대 창설 1938년, 일제는 쉬저우, 정저우 점령에 성공했다. 임시정부는 다시 피난길에 올라 광저우에 도착했다. 1938년 가을, 우한의 대공중학교에선 1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이 모여 항일무장을 조직했다. 대장 김원봉을 필두로 조선의용군 조직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1938년 광저우에서 류저우에 도착해 1938년 12월 광복진선 청년공작대 조직했고, 1939년 4월 유주에서 구이양을 거쳐 치장에 도착했다. 이동은 중국 정부가 도와주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 전선과 민족전선으로 구분돼있는 양 진영에 통일을 종용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좌우합작 성명서였다. 이 성명서엔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으로 서명했다. 그리고 3개월 뒤 치장현에서는 양 진영의 7단체가 모여 7당 회의를 열었으나 2.. 2022. 11. 20.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연합 1. 국민대표회의의 소집과 결렬 1920년 10월,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인솔하는 연합독립군이 백두 산록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 토벌군을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무장 독립을 주장하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승리였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상하이로 와 6개월에 불과했지만 임시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수행함. 임시정부 외교의 첫 수확이 3년 만에 광저우에서 있었다. 중국 호법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이다. (임시정부 특사 신규식) 하지만 1921년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분란과 대립이 생겼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측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던지 새 정부를 만들자며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2개의 파로 나뉘었다. .. 2022. 11. 20.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시작 1. 광복 후 시작된 분열 한민족 최악의 치욕을 견딘 36년이 막을 내리고 희망으로 가득 찰 것 같았던 대한민국. 1945년 8월 15일 아침, 일왕의 항복 직전 조선총독부로부터 일본인의 안전 보장을 부탁받은 여운형은 정치범 석방 등을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고, 여운형은 광복 다음 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각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며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준비했다. 9월 초, 공산주의자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박헌영이 있었다. 9월 6일, 공산주의자들은 곧 도착할 미군에게 자신을 한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내세우기 위해 서둘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도착한 미군은 이튿날 서울에 진입한 미군은 일본군과 총독부의 항복을 받았고, 미군.. 2022.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