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복 후 시작된 분열
한민족 최악의 치욕을 견딘 36년이 막을 내리고 희망으로 가득 찰 것 같았던 대한민국. 1945년 8월 15일 아침, 일왕의 항복 직전 조선총독부로부터 일본인의 안전 보장을 부탁받은 여운형은 정치범 석방 등을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고, 여운형은 광복 다음 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각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며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준비했다.
9월 초, 공산주의자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박헌영이 있었다. 9월 6일, 공산주의자들은 곧 도착할 미군에게 자신을 한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내세우기 위해 서둘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도착한 미군은 이튿날 서울에 진입한 미군은 일본군과 총독부의 항복을 받았고, 미군은 총독부의 행정기구와 인력을 물려받으며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임을 선포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고, 1945년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고국의 땅을 밟았다. 이로써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한반도에 모두 모였고, 여전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1945년 12월 16일,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문제와 한국 문제 등을 위해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찍이 카이로, 테헤란회담에서 일정 기간 신탁통치 하는 것에 대해 합의했었고, 모스크바 회의에서도 신탁통치에 대해 다시 한번 결정했다. 신탁통치 결정 소식은 국내에 큰 충격을 가져왔고, 언론은 발 빠르게 이 소식을 전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오보를 보도했는데, 당초 신탁통치는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오보였던 이 보도는 반탁운동과 반소 감정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독립 만세를 외치며 눈물 흘렸던 것이 불과 몇 달 전. 사람들에게 '신탁'이란 또 다른 식민 지배였고, 이는 전 민족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급박한 상황, 이튿날인 12월 28일,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각계 대표자들을 모아 신탁통치를 막는 것에 대한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다음 날인 29일,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강력한 반탁 운동을 시작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반탁의 목소리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2. 북한에서 시작된 공산화
1946년 1월 3일, 반탁 시위에 참여한 서울 운동장에 모였던 대중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참가했던 시위는 신탁통치 찬성을 뜻하는 '모스크바협정 지지' 시위였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5년만 참으면 독립할 수 있다'고 해명하며 돌연 태도를 180도 바꾼 것.
1945년 12월 28일 밤, 모스크바 회의 결과 공표 다음 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모스크바 회의 결정을 지지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그에 대한 지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밟은 공산화 전략처럼, 38선 이북을 공산화하기 시작한 스탈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통일 임시정부를 세울 때 공산당이 참여해 핵심 요직을 차지하게 할 계획이었다. 한반도의 허리가 끊어진 38선, 그 이남에서 신탁통치의 찬반으로 분열, 대립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서는 소련의 계획대로 일사불란하게 공산화를 진행했다.
1946년 2월 8일, 소련군과 북조선 공산당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을 선임했다. 북한에서 법령을 제정, 집행하는 중앙행정 주권 기관으로 사실상 단독정부였다. 3월에,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은 20일 만에 종료됐는데, 지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거주지로부터 추방됐다. 토지개혁에 추진력을 얻은 소련은 사회개혁을 단행,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친일파, 반동분자, 반민주분자라 하여 숙청했고, 북한 중요 산업시설의 90%를 국유화하는 데 성공했다.
1946년 8월, 북한은 북조선노동당을 창설하며 사회주의 정권 수립으로 거침없이 다가섰다. 이러면서도 소련은 미군정에 대해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하였다.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위원회에 참가할 정당과 사회단체를 선정하는 데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소련은 신탁통치에 동의하는 정당과 단체만을, 미국은 그에 상관없이 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46년 5월 8일, 절충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던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어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이후 미군정과 38선 이남의 각 정파는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끌어가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 국무부는 소련과 협조하는 정책에 반대했던 이승만, 임시정부가 미군정 대신 대한민국의 정부가 되어야 했던 김구 모두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미 국무부는 미군정에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미국의 정책에 협조할 새로운 세력을 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탁 통치 / 반탁운동이란?
반탁운동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안 반대운동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임시정부 계열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가 조직되어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서울에서는 철시와 시위가 행해지면서 군정의 한국인 직원들은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공산 측도 이에 가담했으나 돌연 찬탁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에 민주 진영에서는 비상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통하여 정식 정권을 수립해서 신탁통치를 배척하려고 했다. 이 거족적인 국민운동은 그 해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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