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48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연합 1. 국민대표회의의 소집과 결렬 1920년 10월,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인솔하는 연합독립군이 백두 산록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 토벌군을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무장 독립을 주장하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승리였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상하이로 와 6개월에 불과했지만 임시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수행함. 임시정부 외교의 첫 수확이 3년 만에 광저우에서 있었다. 중국 호법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이다. (임시정부 특사 신규식) 하지만 1921년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분란과 대립이 생겼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측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던지 새 정부를 만들자며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2개의 파로 나뉘었다. .. 2022. 11. 20.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동과 통합 1. 나라를 빼앗긴 조선 조선은 19세기 말 서에서 동으로 밀려오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거센 물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급속하게 성장한 일본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영토확장야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이 이 땅, 조선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조정은 밖으로는 국가 위기에 대한 방책 마련에 소홀했고, 안으로는 파벌과 안인, 부패로 기강마저 해이해져 백성은 신음해야만 했다. 마침내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국정을 농락하고, 더욱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하나둘씩 나라 밖으로 떠났고, 도처에선 의병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의로운 이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나라 안팎에서 잇따라 일어났으며, 조선은 결국 남의 나라에 흡수합병되고 죄 없는 국민들은 망국노가 되는 최악의 날은 오고야 말.. 2022. 11. 20. 625전쟁, 1·4후퇴와 휴전, 사망자 수 1.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소련과 중공은 참전을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북한이 망하면 중국이 위태로워진다고 하며 당초의 약속대로 군대를 보냈다. 스스로 북한을 돕기 위해 지원했다는 조선의용군이란 이름으로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 1차로 30여만 명의 병력이 압록강 세 개의 지점을 거쳐 입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적의 주력은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이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이 가진 것처럼 북한군의 작전권도 사실상 중공군에게 넘어갔다. 중공군은 일본군과 또 장제스의 북부군과 싸우면서 전투력이 강해진 군대였다. 소련군도 1950년 11월부터 참전했다. 소련군은 공군을 참전케 했다. 스탈린의 확전 가능성을 우려하여 소련군 비행기를 중공 항공기인 것처럼 꾸몄고 조종사는 중공군 복장에 .. 2022. 11. 20. 625전쟁, 남침을 시작한 북한 1. 남침을 개시한 북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제타격 작전에 따라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서쪽에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는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북한의 김일성은 6월 25일 오후 1시 35분,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북한의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오늘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북한은 그에 반격한 것이라고 남침을 은폐했다. 한국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당일 개성과 동두천 포천을 점령했고 서부전선에서는 파주 문산을 거쳐 중부 전.. 2022. 11. 20. 이전 1 ··· 5 6 7 8 9 10 11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