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라를 빼앗긴 조선
조선은 19세기 말 서에서 동으로 밀려오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거센 물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급속하게 성장한 일본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영토확장야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이 이 땅, 조선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조정은 밖으로는 국가 위기에 대한 방책 마련에 소홀했고, 안으로는 파벌과 안인, 부패로 기강마저 해이해져 백성은 신음해야만 했다. 마침내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국정을 농락하고, 더욱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하나둘씩 나라 밖으로 떠났고, 도처에선 의병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의로운 이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나라 안팎에서 잇따라 일어났으며, 조선은 결국 남의 나라에 흡수합병되고 죄 없는 국민들은 망국노가 되는 최악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날, 1910년 8월 29일 국권피탈의 해였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무능한 지도자를 원망하고 신세 한탄만 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생존권을 포기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중국 다롄은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에겐 중요한 거점이었고, 국제자유도시였던 상하이는 중국 및 세계 각지의 교통이 유리하여 독립운동 지사들이 여러 방면에서 모여들었다. 이미 독립운동가 등 수백명이 일본의 손이 미치지 않는 프랑스 조게 공동 조계 안에 상하이의 어느 곳에 거주했다.
1919년 4월, 프랑스 조 계에 있는 집에서 지방 출신 대표자와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모여 임시 의정원 구성했다. 첫 번째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했고, 7명의 국무위원을 선출했다. 온 누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한 것이었다.
김구는 감옥에서 나와 교육사업을 하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한다.
임시정부는 첫 번째 외교활동으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보내 한국의 독립운동을 청원했고 국내에는 지방행정제도로써 연통부를 설치해 운영키로 하고 서울을 비롯해 지방으로 퍼지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2년 뒤 붕괴하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원했던 김구는 초대 경무국장에 임명돼 일본 첩자를 색출하고 배신자를 처단했다. 그는 임시정부를 수호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2. 통합된 임시정부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기다렸다는 듯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목적이 같아 결국 러시아 땅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와 흡수 통합돼 단일정부가 됐다. 각원의 인선도 다시 했는데 먼저 임시 대통령에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임했다. 그 밖에 박용만, 신규식, 노백린이 새로 내각에 합류했다. 새로 시작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가장 먼저 국무부 보고를 통해 온 국민의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상하이에는 1년여만에 천 명이 넘는 한인 동포가 모여 살았다.
대부분 독립운동을 위해 모인 지사와 그 가족들. 그런데 큰 뜻을 품고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지사들이라 해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일정한 직업도 없고 별다른 생계 수단도 없어 이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김구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부인 최 씨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상하이로 왔다. 비로소 김구는 잠시나마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1920년 11월 상해 도착. 프랑스 자치구에 위치한 상해임시정부.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이승만에게 큰 기대를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독립자금을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무장투쟁 세력의 이동휘, 박용만과 실력 양성을 주장한 안창호, 이승만의 외교 독립론까지 다양한 독립노선이 갈등하며 임시정부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첫 국무회의에서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 문제에 비판을 가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이승만이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낸 것을 문제 삼았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는 이승만을 비판했다. 우리는 지금 즉각적 독립을 하려는 것이지 또 국제연맹에 우리의 운명을 위탁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그들도 역시 일본과 나라만 다들뿐 똑같은 제국주의 열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청원서는 결국 우리가 제국주의의 지배를 계속 받아야 한다는 점에선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위임통치청원서란?
1919년 2월 25일, 청원서 주요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전제로 당분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받게 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이다. 청원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저희는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의 자유 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조치는 극동에 새로운 하나의 완충국을 탄생시킴으로써 동양에 있어서 어떤 특정 국가의 확장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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