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000만 명이 희생된 전쟁의 시작
1945년 베를린, 붉은 군대의 마지막 전투. 드디어 유럽은 나치의 공포정치에서 벗어났다. 히틀러의 최후가 점점 다가왔고, 그는 끝까지 쇼맨십을 발휘하며 떠났다. 이제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군인과 소년은 없었다. 이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은 5,000만 명. 대부분은 무고한 시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독일 여성들에게는 지옥 같은 날들이 계속됐다.
"나는 머리를 계단에 대고 누웠다. 러시아 군인 중 한 명은 계속 시계를 보았고 나머지 군인들은 내 속옷을 찢더니 그를 내 몸 위에 눕혔다." 지금으로부터 79년 전, 우리가 살아보지 않았던 그 세상은 욕망과 절망, 분노와 시신으로 가득 찼다.
1932년, 베를린은 유럽의 문화 중심지였고 전 세계에서 가장 활기차고 개방적인 도시였다. 하지만 1933년, 모든 게 달라졌다. 퇴역군인들의 괴로움을 선전하며 부상한 히틀러와 그의 시민군은 나치의 노래를 부르며 독일 통치권을 잡았다. 나치는 독일 좌파의 분열을 기회로 삼았다. 주먹을 치켜드는 독특한 경례를 하는 히틀러는 좌파를 지지하는 듯 보였다. 독일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았다. 사회 민주당을 진정한 적으로 간주하라는 내용이었다. 협력은 가당치도 않았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고 몇 달 내에 독재 정권을 안착시켰다. 그는 지도자가 됐다.
추종자들은 손을 들고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하지만 모든 독일인이 히틀러를 지지하진 않았다. 그는 바로 상징적인 민족자결주의 슬로건을 국민에게 주입했다. "우리 앞에 독일이 있다. 우리 안에서 독일이 움직이고 우리 뒤로 독일 전체가 뒤따른다!" 대중을 설득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던 히틀러. 그는 결국 더 많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서전에 밝힌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프랑스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의 군대와 영토 일부를 빼앗겼던 치욕을 갚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임무는 '생존 공간'을 정복하는 일이었다. 당시 독일의 인구는 8,000만 명으로 프랑스의 두 배에 달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세계 초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기형적인 반유대주의자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내몰린 게르만계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확실히 보이는 임무도 맡았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패배, 인플레이션, 실업의 모든 원인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 전쟁은 유대인에 대한 전쟁이라고 확정 지었다.
1938년, 히틀러는 독일어를 쓰는 모든 사람을 나치 독일로 편입시키기로 했다. 그 시작은 그의 고향이었다. 안슐루스, 즉 합병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같은 공포 시대를 맞았다. 나치는 마우트하우젠에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1938년 9월 30일, 나치즘의 중심부 뮌헨에서 11시간 넘게 평화 회의가 진행됐다. 한쪽엔 점점 난폭해지고 있는 히틀러와 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있었다.
파시즘의 창시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전역에 파시즘을 주입했다.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맞은편엔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가 있었다. 보수주의자인 영국 총리 체임벌린, 급진 사회주의자 프랑스 수상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평화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은 결국 힘든 사안을 승인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지역을 히틀러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다른 유럽 국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2. 움직이기 시작하는 히틀러
약속한 지 겨우 6개월 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프라하에 입성했다.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을 앞세워 프라하에 당당히 들어간 히틀러. 나치당 창립 멤버이자 공군 지휘관인 괴링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를 조종했다. 이제 히틀러에겐 독일어권의 재결합이라는 명분이 필요 없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연합국이 이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소련은 독일 인접 강대국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히틀러에게 맞섰다. 프랑스와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공산주의 러시아와 위성 공화국의 공식 명칭이다. 스탈린은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냈다. 소련은 국가 차원에서 산업화와 군사화를 주도하며 주요 강대국으로 올라섰다. 그 때문에 서구 열강은 공산주의를 주창함에도 소련을 의지하고 있었다.
1939년 여름, 히틀러는 이들을 제압하기로 했다. 그는 별장에서 외무장관과 작전을 준비했다.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로 한 히틀러는 나치 당원을 모스크바로 보내 최악의 적국과 역사적인 조약을 맺었다. 스탈린 정권의 외무장관이 독소조약을 체결하자 공산당은 크게 당황했다. 프랑스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때는 1939년 8월, 프랑스인들이 최초의 유급휴가를 즐길 때였다. 이는 사회주의 인민 전선의 업적 중 하나였다. 이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소련은 스탈린이 시간을 끄는 사이 히틀러와 서구 열강들이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폴란드 일부를 장악하려던 스탈린은 히틀러와 영구적으로 유럽을 나눠 가질 수 있다는 환상에 취했다.
1936년, 또다시 유럽 내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중립법을 통과시킨 미국 의회. 이로써 미국이나 소련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히틀러. 그는 이 기회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겪었던 최악의 굴욕을 설욕하기로 다짐했다. 전쟁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유럽에 다시 핏빛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프랑스에 설욕하기로 다짐한 히틀러. 그는 폴란드를 침공하고 단치히를 수복하기로 결정했다.
'근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치의 공격과 함정_2차 세계대전(3) (0) | 2022.12.01 |
---|---|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폴란드_2차 세계대전(2) (0) | 2022.12.01 |
1차 세계대전_드디어 끝난 전쟁 (0) | 2022.11.30 |
1차 세계대전_끝을 향해 진격하는 연합군 (0) | 2022.11.29 |
1차 세계대전_몰락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0) | 2022.11.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