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시작된 전쟁
때는 1939년 9월 1일, 오전 5시 35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포가 단치히에서 발사됐다.
히틀러는 프랑스와 영국이 대응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양국 정부는 즉시 만나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행위를 중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에 보냈다. 하지만 히틀러는 선언했다. "우리의 적들은 하찮은 벌레들이다. 단치히를 목표로 한 세계대전에 누가 감히 발을 담그려 하는가!"
1939년 9월 3일 오전 11시,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가 선전포고를 발표했고 오후 5시엔 프랑스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히틀러와 독일 장군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였다. 2개국과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국방군을 폴란드로 파견했다. 마치 먼 옛날 치렀던 전쟁처럼 폴란드의 기마대가 독일 탱크 부대를 맞았고, 결국, 전멸했다.
1939년 9월 3일, 파리의 한 기차역. 이 중 많은 사람이 25년 전에도 이 플랫폼에서 기차를 탔다. 그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1914년 8월, 사람들은 총에 꽃을 달고 씩씩하게 전쟁터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엔 꽃도 총도 없었다. 아무도 원치 않았던 이 전쟁에 400만 명의 프랑스인이 징집됐다. 그때만 해도 프랑스는 농업 국가였기에 징집된 병력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걸어서 독일 국경으로 향했다. 장교들은 말을 타고 뒤따랐다. 당시 군대는 주로 말에 의존하고 있었다.
2. 마지노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프랑스
1937년 9월 7일, 선전포고한 지 나흘. 프랑스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폴란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 이 공격 이후 프랑스군은 8km가량 진군했다. 프랑스의 공격은 그 지점에서 멈췄고, 전쟁의 양상은 최정예 게릴라들의 전초전으로 바뀌었다. 이 공격을 이끈 조제프 다르낭은 프랑스 최우수 군인이라는 표창장을 받았다. 표창장을 받은 최우수 군인, 조제프 다르낭. 그는 나중에 독일군에 가장 열렬히 협조한 프랑스 군인이 되었다. 프랑스 군은 수적으로 우세하고, 군 내에 전쟁 영웅도 많았지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합참의장, 모리스 가믈랭은 이 전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가믈랭은 끔찍했던 1914년의 전쟁을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지옥 같은 학살극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노선 뒤에서 2년 동안 안전하게 버티며 군대를 재무장하려 했다. 마지노선. 그것은 프랑스의 전직 국방성 장관인 앙드레 마지노의 작품이었다.
이 복합적인 방어 요새는 독일군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지어졌다. 완공하기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걸렸고, 요새를 짓는 데에 무려 콘크리트 150만 세제곱미터와 강철 15만 톤이 쓰였다. 마지노선의 길이는 총 720km. 스위스에서부터 벨기에 국경까지 이어졌다.
아르덴 숲에서 끝나는 마지노선. 프랑스 육군 사령관은 독일의 탱크가 험한 숲을 헤쳐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프랑스가 북해까지 마지노선을 잇지 못한 이유는 중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우방이었던 벨기에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노선 전선 북쪽에는 프랑스 육군과 영국 원정대가 배치돼 있었다. 후에 캐나다군과 영국 식민지에서 건너온 군대가 전선에 합류했다.
히틀러도 마지노선에 맞서기 위해 긴 방어선을 구축했다. 독일군은 공격하지 않고 계속 두 번째 전투를 피하려 했다. 독일군이 진군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프랑스는 예방책을 마련했다.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주민들을 다른 지방으로 피신시켰다. 주민들이 모두 떠난 스트라스부르는 유령도시가 됐다. 히틀러는 폴란드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에도 정신적 공포를 안기고 싶어서 벼르고 별렀다.
세계는 공포에 휩싸였다.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바르샤바 공습 뉴스가 흘렀고, 모든 신문의 1면은 이 소식을 다뤘다. 미합중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대국민 연설을 했다.
"미국은 중립국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미국 국민에게 중립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중립을 지킨다 해도 사실에 주목할 권리는 있습니다. 중립을 지킨다 해도 양심을 저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바르샤바 침공으로 대도시의 취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의 기념물을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박물관의 유명 작품을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
에펠탑 바로 밑에는 거대한 방공호가 생겼고, 공습 훈련이 자주 시행됐다. 필수품이 된 방독면. 어린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 폴란드는 무자비한 공격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소련은 히틀러에게 동의한 대로 폴란드의 동부 지방을 침공했다. 이곳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은 친구처럼 지냈다. 물론, 속셈은 전혀 달랐다. 나치는 "독일군은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붉은 군대를 환영하고, 언제나 최고의 경의를 표해왔다"라고 쓰인 전단을 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폴란드군은 독일군에 항복했고, 동쪽에서 소련군에 항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폴란드 포로 2만 명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자신들이 흡수할 나라의 최정예 병사들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무려 4,500명에 달하는 폴란드 장교가 총살됐다.
스탈린이 폴란드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자세히 따져 보면 히틀러의 계략에 빠진 셈이었다. 히틀러는 소련과 공동 국경을 만들고 러시아를 침공할 속셈이었다. 폴란드를 직접 돌보기로 한 히틀러와 친위대 총통 히믈러는 폴란드 점령 지역에 나치 총독 한스 프랑크를 보냈다. 프랑크는 "폴란드 국민의 생과 사를 결정한 권한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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