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독일
1918년 10월, 프랑스의 동부와 북부지역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포슈 장군은 전선 전체에서 적군을 향해 거침없이 밀고 나갔다. 미군은 아르곤 지역에서, 프랑스군은 뫼즈, 샹파뉴, 피카드리에서 공격을 펼치고, 영국군은 오스트레일리아 기병대와 캉브레로 나아갔으며 벨기에군과 캐나다군은 몽스로 진군했다. 버티던 독일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전선을 지키려던 최후의 반격이 좌절되자 수많은 독일 병사는 항복했다. 이들은 싸우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많았다.
하지만 독일군 지도자들은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 병사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독일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근로자 의회는 대도시를 장악했다. 루덴도르프는 자신의 힘이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1918년 10월 25일, 루덴도르프는 마침내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군에게 항복이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해야만 한다." 이것이 등 뒤의 칼이라 불리는 전설의 시작이었다. 루덴도르프와 히틀러 두 사람에게 있어 적은 독일군이 아닌 정치인들이었다.
1918년 10월 29일, 벨기에로 간 빌헬름 2세는 독일군 총사령부를 방문해 군의 충성심을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됐고 모두 그의 퇴위를 요구했다.
1918년 11월 9일,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나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위대한 제국과 군주의 씁쓸한 종말이었다. 오스트리아 황실의 황금 마차는 헐값에 팔렸다. 빈 시민들은 더 이상 아름다운 지타 공주의 모습에 황홀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오랜 기간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마찬가지였다. 무게 2만 톤에 이르는 가장 막강한 전함이 이탈리아 어뢰에 격침됐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황제는 지타 공주와 함께 망명을 떠났다.
2. 마침내 이루어진 휴전 협정
1918년 11월 11일, 포슈 장군의 특별 열차가 파리 북부의 콩피에뉴 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이 열차에서 독일 정부의 특사들이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독일은 패배를 받아들였고, 적대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전선에서는 오전 11시에 휴전이 선언됐다. 1918년 11월 11일, 11시였다.
이 휴전은 4년간 이어졌다. 7,500만 명의 병사가 전쟁에 동원됐고 1,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포르투갈 7,000명, 벨기에 40,000명, 불가리아 90,000명, 미국 120,000명, 터키 350,000명, 이탈리아 450,000명, 영국이 900,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200만 명, 프랑스와 그 식민지, 세네갈,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이 1,400만 명을 잃었다. 독일군 1,700만 명, 러시아군 1,800만 명이 전사했다. 또 2,000만 명의 병사가 다쳤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세계에는 기쁨이 넘쳤다. 오랜 기간 헤아릴 수 없는 집단 학살이 이뤄진 후였다. 지도자들은 희생과 영광을 향해 전진한 병사들을 위해 수많은 기념비를 세워 전쟁의 기억을 형상화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있었던 총살, 학살의 기억은 모두 지웠다. 이 기념비들은 조국을 위해 죽음을 불사르는 일이 옳은 일이었다고 계속해서 꾸며냈다.
1918년 12월 13일, 파리. 클레망소 총리와 그의 정부는 특별한 손님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방문한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됐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전쟁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남았고 여러 곳에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미국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윌슨은 세계 무대를 지배하는 존재가 이제 미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이에 따라 세계의 많은 나라가 독립과 새로운 국경 수립을 요구했다.
한편, 무수한 포격과 화학전, 수많은 시체로 인해 오염된 30제곱 km의 땅. 이제 이 땅에선 영원히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난민들은 살던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수백 개의 마을이 사라진 뒤였다.
미국 대통령과 프랑스, 영국은 혹시나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막기 위해 국제기구를 설립했다. 그들은 이 기구를 국제연맹이라 불렀다.
3. 전쟁, 그리고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사라예보 암살 사건 후 5년이 흐른 이날, 힘을 합쳐 싸워 독일을 물리친 모든 나라의 대표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기나긴 협상 끝에 평화 조약에 서명하기로 한다. 당시 유명했던 거울의 방이 서명 장소로 결정됐다.
1871년 바로 이곳에서 빌헬름 1세는 프랑스군을 격파한 뒤 독일 제국의 황제가 됐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장소에서 독일의 대표자들은 전승국들이 강요하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훗날 히틀러는 이 조약을 '명령'이라 불렀다.
연합국은 독일의 식민지를 나눠 갖고 독일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이 조약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영국의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이 빈곤해지고, 그 나라의 아이들이 굶주리면 복수는 신속히 이뤄질 것임을 나는 감히 예언한다."
하지만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일부 지역은 이탈리아로 넘어갔고, 남은 지역에서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
독일은 두 지역으로 분단됐고, 폴란드가 바다를 접하게 됐다. 러시아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제외됐다. 격렬한 내전 끝에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 이른바 소련이 됐다. 윌슨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강력히 비판했고, 의회는 비준에 실패했다.
한 상원의원은 윌슨에게 말했다. "대통령님, 고통스러울 만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저는 이 조약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초래하는 조약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막 종결지은 전쟁보다 훨씬 더 참담하고 파괴적인 전쟁 말입니다."
영국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국이었다. 국왕과 총리, 포슈 장군은 승전국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이들에게도 분열이 일어났다. 영국의 전쟁 후속 조지는 전쟁의 재발을 막는 데에 맞춰져 있었지만, 프랑스는 독일의 처벌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이 당시의 독일 아이들은 수치심 속에 자라며 복수를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불행하게도, 그 복수는 현실이 됐다.
어쨌든, 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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