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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차 세계대전_끝을 향해 진격하는 연합군

by 휴이_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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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에 퍼진 스페인 독감

1918년 4월, 상황이 심각해지자 영국, 프랑스, 벨기에는 하나의 사령부가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연합군은 포슈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승리는 의지의 문제"라고 외쳤다. 포슈 장군은 파리 동부에 위치한 미군 본부에서 퍼싱 장군을 만나 모든 병력을 쏟아부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퍼싱 장군은 그 요청을 거절했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퍼싱 장군은 1919년이 되어야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포슈 장군은 격분했다. 퍼싱 장군은 자기 병사들을 참호전으로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야전에서의 전투를 준비했다. 

 

미군은 독일을 폭격할 준비를 했다. 곧 모든 전선에 전투기 조종사들이 배치됐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공중전이 시작됐다. 누군가는 역사를 만들고 누군가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그중 80차례의 승리를 달성한 독일군의 에이스, 리히트호펜은 연합군의 악몽이었다. 색깔 때문에 그에게 붙은 별명,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은 같은 중대의 조종사들과 새로운 전술을 짰다. 붉은 비행기를 타고 매우 낮게 날면서 미끼 역할을 하고 상공에 숨어 있는 동료들이 적군의 비행기를 처치하는 작전이었다.

 

1918년 4월 21일, 리히트호펜은 기관총 두 정을 싣고 이륙을 준비했다. 영국 전선 위를 날며 적군 조종사에게 쫓기던 그는 지나치게 낮게 하강하다가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대공포에 심장을 맞았다.

 

1918년 4월, 붉은 남작의 죽음에 독일인들은 깊이 상심했다. 설상가상 군수물자 공급이 끊어진 탓에 독일군의 진군은 수렁에 빠졌다. 장교들은 부하들이 음식을 찾아다니느라 제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부족한 음식, 묻혀 있다가 포격 때문에 튀어 오른 시체들 때문에 오염된 물, 급격히 퍼진 해충. 여기에 많은 사람의 이동이 합쳐져 14세기의 흑사병 이래 가장 끔찍한 역병이 발발했다.

 

스페인에서 검열받지 않은 한 신문사가 보도해 이름 붙은 '스페인 독감'은 유럽 전역,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를 강타해 전 세계에 3,000만 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이 유행병은 모든 교전국에 영향을 미쳐 영국군 병사 20만 명, 프랑스군 40만 명, 독일군 50만 명이 스페인 독감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이에 루덴도르프는 아프거나 요양 중인 병사들에게 당장 전선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빌헬름 2세는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의 군대는 적군의 전선을 완전히 부수지 못했고 어쩌면 곧 맹렬한 포화를 맞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때, 지금까지 조용했던 생미엘에서 독일군 부대 하나가 미군 진지를 기습했다.

 

2. 미국의 분노와 진격의 연합군

1918년 4월, 미군은 병사들을 잃었다. 분노한 퍼싱 장군은 반격 명령을 내렸다. 미군 병사들은 독일군의 참호를 빼앗아 자신들의 전투력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최초의 포로들을 촬영했다. 퍼싱 장군은 자기 병사들이 합동 연합군 연대에 합병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진지를 지키기 위해선 백병전을 피할 수 없었다.

 

1918년 6월 26일, 미 해병은 독일의 진군을 막았지만 끔찍한 희생이 동반했다. 미 해병대 역사상 이런 전투는 없을 정도였다.

 

1918년 7월 15일, 독일 병사들은 계속 진군하라는 명령받았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평화를 위한 공격'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기습부대 병사들은 이제 미군과 싸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독일군이 더는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이어서 그는 마지막 사단 병력 60만 명을 파리로 보냈다.

 

2차 마른강 전투가 발발했다. 독일군은 1914년 8월에 밟았던 그 밀밭을 다시 지났다. 밀밭을 지나던 독일군. 그 앞을 기다리던 프랑스군. 퍼슈 장군은 100만 명의 병사와 탱크 500대를 동원해 연합군의 대반격을 이끌었다. 영국, 프랑스의 탱크를 보급받은 미군.

 

1918년 8월 8일, 연합군의 탱크들이 파리에 가까이 있는 독일군에게 거침없이 진격했다. 탱크와 예비 병력이 부족한 독일 육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루덴도르프는 이날을 '독일군 암흑의 날'이라 불렀다.

 

'평화를 위한 공격'에 실패한 루덴도르프. 그는 연합군이 독일 국경으로 진군하는 것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그리스의 부대가 발칸반도를 다시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다마스쿠스로 진군하는 영국군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군은 아랍 부족들의 지원으로 터키 영토인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정복했다. 

 

1918년 9월 30일, 아라비아의 전사들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 이들의 수장은 후세인의 아들 에비르 파이잔이었다.  

 

파이잘의 승리는 그의 조언자, 영국 첩보원 로렌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임무는 아라비아에 돈과 무기를 제공하고 터키에 대한 반란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라비아어를 구사하고 이 지역의 의복을 입은 로렌스는 베두인족 사이에 잘 융화됐다. 로렌스가 게릴라 부대의 지도자가 되자 영국군은 약속을 어기고 파이잘에게 약속했던 오스만 제국의 땅을 프랑스와 나눠 가졌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가지고 영국은 새로운 나라, 이라크를 세웠다. 훗날 영국은 파이잘을 석유 부국의 왕좌에 앉힘으로써 그를 달랬다. 하지만 파이잘은 로렌스를 용서할 없었다. 아라비아인들 역시 분노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주민들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1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고, 세계 여러 곳에 분쟁의 씨앗이 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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