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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연합

by 휴이_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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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대표회의의 소집과 결렬

1920년 10월,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인솔하는 연합독립군이 백두 산록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 토벌군을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무장 독립을 주장하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승리였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상하이로 와 6개월에 불과했지만 임시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수행함. 임시정부 외교의 첫 수확이 3년 만에 광저우에서 있었다. 중국 호법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이다. (임시정부 특사 신규식)

하지만 1921년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분란과 대립이 생겼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측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던지 새 정부를 만들자며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2개의 파로 나뉘었다. 

창조파 : 신채호 선생 - 이승만 탄핵하자! 임시정부 해체하고 다시 출발하자! 
개조파 : 안창호 선생 - 임시정부는 어떻게든 정통성이 있으니 임시정부 안에서 변화하자. 바꾸자.

국민대표회의는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이것도 결렬되었고, 독립운동가들은 회의 이후 임시정부를 다 빠져나갔다. 그중에 끝까지 남은 인물이 김구였다.

 

2. 탄핵된 이승만과 김구의 취임

구심력 없는 임시정부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후 많은 개헌과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에 이승만은 탄핵당했고, 재도약을 위해 2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 내각제로 개편했다. 또 한 번의 개헌을 통해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만들어졌고 마침내 김구가 5대 국무령에 취임했다.

1925년에 건립된 연립주택은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할 무렵(1926.12)부터 윤봉길 의거로 정부가 피난길에 오를 때까지 여섯 해 동안 사용했던 곳이다. 상하이 시절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였다. 임시정부 수립 후 가장 어렵던 시절, 지사와 그 가족들은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다. 어린 손자들을 보살피러 와있던 김구의 어머니는 배추껍질을 줍기 위해 시장 쓰레기통을 줍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1923년 인성학교를 세웠다. 

1928년 장제스는 중국을 통일했다. 중국의 정세 급박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 침공해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일제는 만주국을 세웠다. 그 무렵 한국독립당을 세운 임시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만주사변으로 위기에 처한 무장 독립운동을 특무공작으로 바꾸고
김구에게 그 전권을 맡겼다. 이에 김구는 바로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를 써 급한 대로 공작자금부터 마련하기 시작했다.

1931년 12월, 32살의 이봉창은 김구 앞에서 애국단 단원으로 서약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1월 8일 낮 2시 일본 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비록 죽이지는 못헀지만 한국인의 강인한 독립 정신을 온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국내외 동포 및 중국인들에게도 대단한 감격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일본은 분풀이로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상해를 공격했다(1932).

 

3. 윤봉길의 희생과 장제스의 지원

상하이 침공 3달 뒤인 4월 29일 일본군은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식이 막 끝나갈 무렵 윤봉길은 겨레로부터 위임받은 임무를 완수했다. 윤봉길의 폭탄에 단상에 있던 침략자들은 고꾸라졌고, 중국 장제스의 말처럼 중국 100만 군대가 못한 일을 단 한 사람의 한국인이 해냈다. 훙커우 의거에 의한 중국인들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나타나자 일본 군경은 프랑스 조 계까지 몰려와 닥치는 대로 집을 수색하고 체포했다.

훙커우 의거로 인해 안창호 선생을 포함한 임시정부 20명의 인사가 체포됐다. 이봉창, 윤봉길의 양대 의거는 침체했던 독립운동의 활력소가 됐고 임시정부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크게 신장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한국의 망명정부는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서양사람으로 위장해 상하이를 탈출한 김구는 인근의 호반 도시 자싱시로 피신했다. 이 지역 중국의 명망가가 은신처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국무위원 김철은 김구가 탈출하기 4일 전 항저우로 미리 피신한 뒤 임시정부의 판공초를 개설했다. 자싱시는 토지가 비옥하고 경관이 수려한 곳이었다. 13년 동안 프랑스 조계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던 김구는 중국인 친구들과 함께 피로와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일본 정탐꾼들의 발길이 여기까지 미쳤다. 김구는 다시 중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하이옌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김구는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자싱시로 돌아온 김구는 위장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한 여자 뱃사공(쭈아이바오)에게 자신을 의탁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밤에는 호수에서 머물고 낮에만 땅을 밟는 선상생활을 했다.

한편 상하이에서는 애국단의 활동을 본받으려는 열혈 청년들이 또 하나의 거사를 시도했다. 1933년 5월 장제스를 만나러 김구는 난징으로 갔다. 장제스는 의거 때문에 김구를 잘 알고 있었다. 김구가 특무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요구하자 장제스는 한국 청년들을 모아 무관훈련부의 터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중앙육군 군관학교 뤄양 분교에는 한국 청년들을 위한 특별반이 개설됐다.

독립운동진영 일부에선 각 혁명단체가 하나의 신장으로 태어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됐고, 1935년 11월 민족주의자 김구는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은 인원들로 한국국민당 결성했다.

1936년 8월. 망명 독립운동가들에게 가뭄에 단비처럼 몹시 반가운 소식 한 가지가 날아들었다. 손기정 옹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중일전쟁 후 김구를 불러 비밀회담을 했고 김구는 이때야말로 한국 독립운동단체들이 단합해서 대일항전에 중국과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현실이 되어 1937년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됐다.

중국에 있는 세 단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합의하고 이어 미주에 있는 6단체 대한인 독립단, 애국단, 동지회, 단합회, 국민회, 애국부인회가 가담하여 민족진영의 연합 표가 만들어졌다.

1937년 11월, 일본은 난징을 폭격했다. 중국은 충칭으로 천도했고, 한국의 임시정부와 요인, 가족들도 피난길에 올랐다. 망명정부의 유랑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난징에서 출발한 지 1달이 못 돼 난징은 일본군에 의해 30만명이 학살당했다. 

독립운동계 인사계는 통합에 대한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각 당의 대표가 모여 회의하던 도중 괴한이 들어와 총을 난사했다. 범인 이운함은 중국 당국에 체포됐지만 도주했다. 배후나 동기는 일제의 책동일 가능성이 있으나 밝혀진 것은 없다. 1명 사망, 중상과 경상. 후난성 주석은 치료비 전액을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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