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19혁명의 배경
광복 후 시작된 이념 갈등과 남·북 단독 정부 수립,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 국가 재건에 힘썼어야 할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수습을 뒤로하고 전쟁 중 헌법을 개정하여 제2대 대통령에 이승만 취임, 다시 헌법을 개정하여 제3대 대통령에도 이승만이 취임하며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다.
1959년, 이승만은 제4대 대통령 취임에 위협이 된 조봉암에게 누명을 씌워 사형시켰고, 제4대 대통령 자리를 눈앞에 두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환멸에 기울어 무능해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가만히 있어선 절대 봄이 오지 않을 것이라 직감한 학생들의 분노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2월 28일, 민주주의의 첫 도화선, 대구 독재 정권하에 진행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 선거.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은 2월 28일, 민주주의 혁명 도화선에 첫 불을 붙인 도시, 대구. 일요일임에도 민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등교를 강요한 자유당. 대구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경북고등학교를 필두로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3월 5일 서울, 8일 대전, 10일 수원·충주, 12일 부산·오산·포항·원주·인천까지. 전국은 학생들의 분노로 뒤덮였다.
3월 15일, 부정 선거와 마산 의거. 시위에도 독재 정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유권자 협박, 사전 투표, 대리 투표 등 부정 선거를 자행한 결과 97%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됐다.
투표 당일, 전국에서 시민과 학생들은 유린당하는 민주주의에 손을 뻗었고 특히 마산 시민들과 고등학생들은 대단한 궐기를 일으켰다.
시민들을 향해 지체 없이 총을 겨눈 경찰. 경찰의 총에 7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던 3·15 마산 의거를 시작으로 독재에 갇힌 민주주의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선거 다음 날 서울·광주·진주·부산·포항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발생했고, 독재 정권의 만행에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불붙은 자유 민주주의의 열망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4월 6일,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난 서울. 그 열기는 3일 뒤 부산에 전달됐고, 불붙은 국민의 열망에 기름을 쏟아부은 사건이 발생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고등학생의 시신이 떠오른 것이다.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오른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열사. 최루탄을 쏜 자는 경찰이었다.
시신을 은폐하고 바다에 던진 독재 정권에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계속된 2차 시위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분노. 시민을 향해 감히 총을 겨눈 독재 정권을 용서할 수 없던 시민들. 폭발적인 시위에 대통령 이승만은 4월 13일, 마산 시위 등 일련의 정국에 대한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이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 공산당의 선전 때문에 마산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3·15 부정 선거 이후 산발적으로 진행됐던 학생들의 시위는 4월 18일 서울·부산·청주에서 대규모로 일어나며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귀교 행진을 하던 고려대 학생 3,000여 명. 그들에게 돌진했던 반공청년단 깡패 100여 명은 학생들을 마구 난타했고, 민주주의 정신을 짓밟았다.
2. 1960년 4월 19일
1960년 4월 19일,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마산 사건의 분노를 표출하는 학생, 시민 시위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서울대학교·동국대학교·건국대학교·중앙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와 대광고등학교·배재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총궐기의 깃발을 올렸다. 수십만의 시위 군중은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오후 1시 20분, 경무대(현 청와대) 앞 중앙청까지 다가갔다. 중앙청을 사수하던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또 무차별로 발포했다. 여기서 사망한 21명과 다친 수백 명의 시민. 독재 정권은 또 한 번 끔찍한 단면을 보였다.
'피의 화요일'로 명명된 4월 19일. 이날 이승만은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은 부통령 이기붕을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민심은 이미 피의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4월 25일 오후 6시경, 동숭동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58명의 대학교수. 그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했다. 교수들의 궐기는 전국을 다시 들썩이게 했다. 이를 계기로 자극받은 시민들은 부정 선거의 원흉을 잡으라고 소리를 높였다.
4월 26일, 결국 이승만은 라디오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마침내 부패한 독재 정권이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에 무릎을 꿇은 날. 4·19혁명. 185명의 희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에도 독재에 항거하며 철저하게 시민들이 주인공이 된 혁명.
4·19 혁명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학생 주도의 혁명으로, 전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4월 26일,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은 시민들의 손에 쓰러지며 그의 독재 정권과 운명을 같이했고, 5월 29일, 자진해서 사퇴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다. 국민의 승리. 학생·시민 할 것 없이 모여 민주주의의 열망을 토했던 4·19혁명 이후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의의 길을 맞이하는 듯했으나, 군인들이 권력을 차지하며 민주주의는 다시 긴 잠에 빠져들었다.
4·19혁명 태워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민주주의는 그들의 꿈이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1960년의 학생·시민들의 꿈이 만든 민주주의는 현실이자 미래의 희망이다.
'근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봉길의 희생과 임시정부 지원 재개 (0) | 2022.11.23 |
---|---|
유관순, 만세를 주도했던 소녀 (0) | 2022.11.23 |
3·1 운동의 배경과 전개, 결말 (0) | 2022.11.22 |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임시정부 (0) | 2022.11.20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연합 (2) | 2022.1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