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1 운동의 배경
1910년, 어둠의 시대로 떨어진 나라. 말을 잃고, 이름을 잃고, 나라를 잃고, 목숨까지 잃었던 시대. 암흑이 짙게 깔린 나라에서 반짝이던 눈으로 숭고한 목숨을 바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종로 탑골공원에서 투쟁의 시작을 알렸던 한 마디, "대한독립만세".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이 제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의 식민지들을 들끓게 했다. '열강들이 약소 민족을 침략하는 행위를 멈추고, 약소 민족들이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기 위해 해방시켜주자!' 이어 러시아 대표 레닌이 "열강, 제국주의에 핍박받는 약소 민족을 지원해주겠다"는 말은 국외적 독립운동에서 '외교 독립론'의 위치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였고,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에는 해당하지 않는 희망 고문의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우리 민족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고, 독립 의지도 그 어느 나라보다 강했다.
1919년 2월 8일, 적의 심장부 동경.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광수,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의 학생들은 동경 YMCA 회관에서 '대한독립 만세'의 메아리를 만들어 내며 역사에 길이 남을 2·8 독립선언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송계백은 모자에 2·8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들어와 우리 민족 대표들에게 보여줬다. 적의 심장부에서 어린 학생들이 만들어낸 만세의 메아리는 우리 땅의 어른들에게 도착했고, 전 세계에 독립 의지를 알리려는 평화적 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또한,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일본이 독살한 것 아니냐는 소문을 만들어냈고, 10년 동안 일제의 군화에 짓밟힌 억울함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만세 시위 준비는 더욱 활발해졌다. 만세 운동하기 위해 필요했던 독립선언서. 최남선이 기초하고 만해 한용운 선생이 추가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제작되었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은밀히 인쇄했다.
문제는 독립선언의 날짜였다.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날짜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을 때 첫 번째로 나온 안건은 고종황제의 장례식날인 1919년 3월 3일. 하지만 인산일에 만세운동을 하는 것은 승하하신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고 주장하는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 15인의 주장에 의해 무산됐고, 그 전날인 3월 2일 일요일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 16인의 주장에 무산됐다. 그래서 결정된 최종 날짜, 3월 1일. 장소는 탑골공원과 탑골공원으로 선정했고, 대표들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으면 학생들이 모여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를 나눠주는 것이 결정됐다. 우리의 독립 의지를 밝히는 평화적 만세 시위를 보여주면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온 세계가 알고, 그렇게 열강들이 우리를 독립시켜주지 않겠느냐는 평화적 만세 시위가 구상됐다.
2. 3·1 운동의 과정
1919년 3월 1일 당일,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파고다 공원으로 구름처럼 모여든 수많은 인파. 하지만 만세 시위가 폭력 투쟁으로 변질할 것을 두려워한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화도 없던 시대. 연락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급박한 그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어른들 대신 한 학생이 연단으로 뛰어올라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학생을 쳐다봤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민족 최대의 만세운동인 3·1운동은 그렇게 학생들의 주도로 현장에서 이루어졌고, 학생들은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10년 동안 군홧발에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삶. 분노와 울분에 젖은 군중들 사이에서 나지막이 들려왔던 소리.
"대한독립 만세!"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이 외친 대한독립 만세, 조국 독립 만세는 조선 땅 전체를 덮으며 비폭력 시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놔둘 리 없던 일본. 말을 타고 온 경찰들은 칼로, 총탄으로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종로에서 시작된 3·1운동. 며칠 뒤 일제의 학교 휴교령으로 인해 지방으로 내려간 학생들은 다시 조직을 만들어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펼치며 시위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했다. 특히,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빼앗긴 농민들의 분노가 점철되어 농촌의 만세운동도 활발했다.
독립의 물결은 국내를 넘어 만주, 연해주, 미주와 일본 본토에까지 닿으며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러한 전국적인 만세에도 불구, 3·1운동은 산발적인 저항으로 조직화하지 못하고 일제의 폭압적인 압박에 눌려 그만 힘을 잃고 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하지 못한 민족대표 33인은 비폭력에서 폭력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예견했고, 대규모 시위로 희생자가 생기면 안 된다는 이유로 선언 이후 경찰에 자수했다. 지도부를 잃은 만세운동은 표류했고, 일제의 잔학한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어린 여학생이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검으로 오른손을 잘랐고, 다시 왼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왼손마저 잘랐다. 두 손이 잘려 나간 학생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 만세를 부르자, 이번에는 검으로 학생의 가슴을 찔렀다. 시위에 가담했던 제암리 남자들을 교회당에 집합시켜 문을 걸어 잠근 뒤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무자비하게 쐈던 제암리 학살사건 등, 일제는 수많은 학살로 3·1운동의 불씨를 점점 꺼뜨렸다.
3. 3·1 운동의 결말
3·1운동. '수많은 유관순'들이 만들고, 잇고, 물려준 독립 열망과 정신은 후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3·1운동 이후 조선 민족을 총·칼로 다스리기엔 한계가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줬고, 이는 이른바 '문화통치'로 일제 통치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운동 중 지도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해 20년대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토대를 만들었고, 1910년대에 비축한 독립운동 기지의 힘을 보여주자는 움직임에 동력을 실어 무장투쟁이 활성화됐다. 이는 활발한 의거 활동과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는데 씨앗을 심었다.
3·1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열강에 억압받는 약소 민족들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과 인민들이 모여 반 제국주의를 외친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무저항 비폭력주의의 간디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102년. 우리는 그때와 크게 달라졌고, 크게 달라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희생이 만들어 낸 우리네 아버지들의 꿈, 그리고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를 잊으면, 새로운 꿈도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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