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소련과 중공은 참전을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북한이 망하면 중국이 위태로워진다고 하며 당초의 약속대로 군대를 보냈다. 스스로 북한을 돕기 위해 지원했다는 조선의용군이란 이름으로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 1차로 30여만 명의 병력이 압록강 세 개의 지점을 거쳐 입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적의 주력은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이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이 가진 것처럼 북한군의 작전권도 사실상 중공군에게 넘어갔다. 중공군은 일본군과 또 장제스의 북부군과 싸우면서 전투력이 강해진 군대였다. 소련군도 1950년 11월부터 참전했다. 소련군은 공군을 참전케 했다. 스탈린의 확전 가능성을 우려하여 소련군 비행기를 중공 항공기인 것처럼 꾸몄고 조종사는 중공군 복장에 중국어를 쓰도록 교육받았다.
중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한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11월 1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유엔군은 큰 피해를 보았다. 평양을 거쳐 초산까지 진격한 국군이 중공군의 포위공격은 받았고 운산 북방 구봉산에서도 중공군에게 포위됐다. 그리고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유엔군 역시 중공군의 압박에 악전고투해야 했다. 10월 25일, 생포한 중공군 포로의 진술 내용을 무시하고 중공군의 출연을 과소평가한 유엔군의 피해는 아주 컸다.
일명 크리스마스 공세였던 12월 24일 최종공세에서도 큰 손실을 본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북 방면의 유엔군도 엄청난 수의 중공군과 맞닥뜨렸다. 북한의 임시수도 평안북도 상계를 점령하기 위해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 1사단은 10배나 많은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5일간 영하 20~30도의 혹한 속에서 치른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3000여명의 전사자 등 사상 최악의 피해를 보았으나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성공적으로 철수했다. 이미 남쪽의 원산 방면이 차단당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12월 23일까지 흥남에서 철수했다. 이때 자유를 찾는 북한 주민 10만여 명도 유엔군과 함께 탈출했다.
2. 국군과 유엔군의 1·4후퇴
결국 1951년 1·4후퇴로 서울을 중공군에 내주었다. 중공군은 경기도 평택까지 내려왔으나 다시 유엔군이 반격했다. 유엔군은 1951년 3월 15일 중공군에게서 서울을 되찾았고 여세를 몰아 3월 말엔 38선을 회복했다. 1951년 4, 5월 중공군의 춘계공세 이후 양측 모두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전선은 교착됐고 휴전이 모색됐다. 미국과 소련은 막후 접촉에서 휴전에 동의했다.
정전 협상의 가장 큰 쟁점은 남북 간 경계선과 포로교환 문제였다. 경계선은 전쟁 전에 38선이 아니라 정전 시의 군사 접촉 선으로 합의됐다. 그러나 포로 교환의 문제는 쉽게 합의되지 않았다. 유엔군은 공산권 포로의 자유의사 귀환을 원칙으로 했다. 이에 대해 공산 측이 반대하여 한동안 휴전회담이 결렬됐다.
하지만 미국 소련 중공 모두 휴전을 원했다. 1953년 3월, 휴전회담이 다시 열렸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휴전 반대가 시작됐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기회가 무산된다고 하여 휴전에 반대했다. 그는 정전회담에서 한국군 대표를 철수시켰다. 정전 시에는 국군의 작전권을 회수해서 단독으로 국군을 북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휴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미 대사관에 난입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진짜 속내는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휴전 후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은 또다시 소련 중공의 후원을 받는 북한의 침략 위험 아래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골치 아픈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까지 검토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더 확실한 약속을 원한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초강수를 구사했다. 27,000여명이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한 것이다.
경악한 미국이 미군 철수로 위협하자 이승만은 이번엔 유화책을 썼다. 정전 결정에 따를 터이니 그에 앞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달라고 했다. 이승만의 끈질긴 투쟁은 미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했다. 미국은 정전 후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3. 상처만 남은 전쟁의 끝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3년 1개월 2일, 1,129일 동안 계속됐던 625전쟁은 휴전 상태로 들어가게 됐다.
625전쟁으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보았다. 주택과 학교 공공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기반 시설과 공장 등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됐다. 물적 피해액은 당시 2년 치의 국민 총생산액에 달했다.
국군 13만여 명 전사, 45만여 명의 부상, 총 62만 명의 인명피해.
UN군 4만여 명 전사, 10만여 명 부상, 총 15만 명의 인명피해.
북한군 52만여 명 전사, 12만여 명 실종, 포로, 총 64만여 명의 인명피해.
중공군 사망 18만여 명, 부상, 포로 82만여 명, 총피해 100만여 명.
민간인 학살 13만여 명, 사망 24만여 명, 행방불명 30만여 명, 부상 23만여 명, 총 99만여 명.
북한 민간인 피해 약 150만여 명으로 집계.
수십만의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발생했고, 이산가족은 천만 명에 달하며 한반도는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625전쟁 전 남한보다 월등했던 북한군의 산업시설과 주택 건물 기반 시설도 대부분 파괴됐다. 이 엄청난 손실과 피해를 보면 북한 공산정권이 무력 통일을 꾀한 것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재난을 초래했는지 알 수 있다. 625전쟁은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 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50년 여름, 남한 주민은 공산 치하를 경험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남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귀속의식과 애국심을 갖게 됐다. 북한 공산집단은 약 20만명의 남한 젊은이들을 인민군으로 납치하여 사지로 몰아넣었고, 농촌에서는 이미 완료된 농지개혁을 다시 했으나 농민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준 대가로 현물세를 징수했는데 경작지 한평당 작물의 포기 수 포기당 이삭 수 이삭 당 낱알 수를 계산하여 이를 일일이 곱한 후 내야 할 평당 세금을 산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매일 집회를 열어 국민들을 동원하고 소위 반동분자를 뽑아 즉결 인민재판으로 학살했다.
이처럼 북한의 점령통치는 매우 가혹한 것이어서 짧은 기간이나마 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했던 남한 주민들의 증오와 원성을 낳고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한편 625전쟁 휴전 후 한미 방호조약이 체결되어 한미 안보태세가 굳건해졌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됐고 1954년 11월 17일에 정식 발효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군 2개 사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특히 이 미군은 최전방 휴전선에 배치되어 북한의 남침 공격 시 자동으로 전투에 돌입하게 됐다. 아울러 국군도 대폭 증강됐다. 전쟁 전 한국군은 10만명 정도였으나 전쟁 후에는 70만명으로까지 늘었다. 해마다 천 명, 총 만 명가량의 군 간부들이 미국에서 연수하며 선진 군 전술과 행정관리법을 전수하였다 이로써 국군의 국방력이 많이 증가했다.
대한민국은 유엔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침략을 물리쳤다. 유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세계지도에서 또 한민족의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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