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침을 개시한 북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제타격 작전에 따라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서쪽에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는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북한의 김일성은 6월 25일 오후 1시 35분,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북한의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오늘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북한은 그에 반격한 것이라고 남침을 은폐했다. 한국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당일 개성과 동두천 포천을 점령했고 서부전선에서는 파주 문산을 거쳐 중부 전선에서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특히 의정부 서울 축성에서 국군의 7배가 넘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국군의 후방 주둔 사단이 전방으로 속속 투입됐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28일 새벽,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까지 격파당하고 만다.
하지만 국군은 전장 곳곳에서 북한군에 용감히 맞섰다. 중국의 국공내전이 국민당군에게서는 사단 병력이 통째로 공산당에 투항하는 일도 있었지만, 춘천을 지키고 있던 육군 6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육군 6사단은 북한군 2사단에 맞서 남하하던 북한군의 발목을 3일이나 묶어버렸다. 당황한 북한군은 홍천에서 전투 중인 12사단의 일부를 춘천으로 급파했고 북한군 12사단 역시 그들이 맡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2. 서울을 탈출한 대통령
북한군에 의한 서울함락이 임박하자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탈출했다. 대한민국의 북한 남침을 물리치려면 그 정부와 대통령이 살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시민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서울을 탈출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3시에 서울을 탈출했다. 국회의원들과 내각도 서울을 탈출했으나 이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국군은 공산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6월 28일 새벽 2시에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당시 서울 시민 대부분이 정부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날 낮에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했고 90만명에 달하는 서울시민의 대부분이 적 치하에 갇혔다. 이들은 928 수복 때까지 끔찍한 공상 통치를 감내해야 했다. 정부는 임시로 대전으로 옮겼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겼다.
그런데 6월 28일, 한강 이북의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 동안 그곳에서 지체했다. 그 덕분에 한국군은 전열을 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정부와 한국군이 전열을 정비함으로써 유엔군의 참전이 가능해졌다. 이승만은 당시 세계정세에서 북한의 남침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은 25일 오전 주한 미 군대가 무초를 만나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한국을 제2의 사라예보로 만드는 것을 피해왔으나 현재의 위기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예보란 세르비아 출신의 한 청년이 오아서 시도 황태자 부처를 저격 살해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된 곳이다.
이승만은 북한의 침략이 단순히 한 민족 내부의 분쟁이 아니라 세계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 진영의 공격이므로 세계자 유진영이 총반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 현지 시각 1950년 6월 24일, 휴가지에서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격노했다. 그는 우리는 모든 수를 써서 그들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이 위협받고 세계반공전 선에서 미국의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제시했다. 유엔은 신속히 움직였다. 6월 25일 유엔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를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의 퇴각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인 27에는 유엔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유엔 결의로 태어난 국가였기 때문이다. 유엔에 의해 성립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곧 유엔을 침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3. 전쟁의 판도를 바꿀 미국의 참전
7월 초,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대한민국을 도우려고 파병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등 총 21개국이 625전쟁에 참여했고 38개국이 물자지원을 하는 등 총 59개국이 지원에 나섰다.
한편 미국은 이와 별도로 남침 개시 다음 날인 6월 26일부터 주일 미 해군과 공군을 투입했다. 6월 29일엔 영등포에 와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방안을 모색했다.
한국군은 북한의 남침 시 일시 후퇴하여 북한군을 남한 깊숙하게 끌어들였다가 반격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강이 1차 방어선 금강이 2차 방어선 낙동강이 3차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대구로부터 남으로 마산까지 서남부 방어선은 유엔군이, 대구로부터 동으로 포항까지는 국군이 방어를 맡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계속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의 맹폭을 퍼부었으며 지상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저지했다. 특히 대구로 통하는 전술적 요지인 대구 북방 22km 지점의 칠곡군 다부동에서는 55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지를 10여차례나 뺏고 빼앗기며 북한군 2만 4천여명, 국군과 유엔군 만여명의 사상자가 나온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유엔군 상륙부대가 한반도 중부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낙동강 전선의 유엔군이 대반격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상륙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제는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승만은 북한의 침공으로 38선은 없어졌으며 이 기회에 북한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9월 말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한국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북진 명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10월 1일 강릉 방면의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했다. 10월 7일엔 유엔군이 삼팔선을 넘었고 그 뒤 유엔 총회가 이를 추인하였다.
10월 19일, 국군 1사단이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국군 중 선두 부대 6사단은 압록강에 도달했고 유엔군도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마지막 공세에 몰입했다. 모두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거꾸로 김일성이 멸망 위기에 몰렸다. 10월 1일, 김일성은 다급히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또 김일성은 10월 12일 비밀리에 평양을 탈출하여 덧천 대 유동으로 옮겼으며 이후에도 미군의 폭격을 피해 압록강 변의 오지로 옮겨 다녔다.
전쟁은 이렇게 끝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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