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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결과

by 휴이_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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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소공동위원회의 결과

1946년 초여름, 미군정은 중도우파 김규식과 중도좌파 여운형을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으나,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미국은 좌우합작을 강압으로 만들어낼 수 없었고, 1946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거 당선되며, 미국은 시간만 낭비한 셈이 되었다.

 

1946년 6월 3일, 미소공동위원회의 무기 휴회 후 지방 순회 강연에 나선 이승만은 정읍에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이 발언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제창하는 발언으로 간주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승만은 미군정이 좌우 합장 운동에서 자신을 제외하자, 직접 미 국무부를 상대하여 정책을 바꾸려 했지만,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김구는 국내에서 반탁운동을 이어 나가면서 미군정과는 별개의 과도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정당, 사회단체를 모아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이 기구를 통해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려 했다.

 

1946년 7월,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타격을 주는 전면적인 대중투쟁을 벌이는 신전술을 발표했고, 9월, 주요 도시에서의 총파업 투쟁과 10월,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위와 봉기를 일으킨 좌익세력 때문에 정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곤란이 가중됐다. 1946년, 북한이 공산주의 방향으로 확고히 나아갈 때 남한은 미군정의 실효성 없는 정책과 정치세력 간의 투쟁으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1947년 봄, 평양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과 소련은 이번 회의에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서약서를 내는 정당과 사회단체만 회의에 참여시키기로 합의했는데, 소련은 반탁운동을 계속하는 정당 사회단체는 서약서를 내더라도 참가시킬 수 없다고 주장해 미국과 또 대립하여 제2차 미소 공동 위원 회의도 결렬됐다. 한반도 문제를 빨리 매듭짓고 싶었던 미국은 소련에 영국과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소련은 거부했고, 미국은 UN에서 한국 문제의 해결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1947년 9월, 미국은 유엔 총회에 한국 문제의 의제 채택을 요구했고,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가 한국 문제를 의제로 채택하면서 한국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47년 11월 14일, UN은 총회를 열고 UN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UN 한국 임시위원단은 남한 조사 이후 북한에서도 조사하고자 했으나 소련이 이를 거부했고, 1948년 2월 26일, 소총회를 열어 남한에서의 선거를 결정했다.

 

2.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를 얌전히 지켜보고만 있을 소련과 남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이 아니었다. 미소 양군 조기 철수와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 문제 처리 주장 등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노린 제안을 했고, 남로당은 폭력 투쟁을 불사하며 전국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를 벌여 경찰과 유혈 충돌했다. 특히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로당 세력이 선거를 막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 군대와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말 '수많은' 양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선거를 둘러싸고 남한 우익과 남북한의 좌익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우파의 김구를 포함한 남한의 중도파들이 선거 반대로 돌아섰다. 선거가 치러질 경우 분단이 굳어지리라는 이유에서였다. 1948년 2월,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 회담을 열자는 제안을 했고, 한 달도 더 지난 3월 25일,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북한은 북한이 먼저 분단 정권을 수립했다고 하는 역사적 비난을 피하고자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불렀다.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 정권에 이용만 당하는 것을 우려했지만 조국의 분단을 막을 마지막 기회라는 애국충정에서 북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연석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한의 단독선거를 비난하는 결의로 이어졌고, 딱히 협상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이러한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고, 5월 5일에 김구 일행이 서울로 돌아왔다. 조국의 분단을 막고자 한 충정은 소련과 북한의 계략으로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했다. 선거 불과 닷새 전이었다.

 

1948년 5월 10일, 태극기가 집마다 게양됐고, 어리둥절한 사람들, 실수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투표에 임했다. UN 한국 임시위원단에서 파견한 30명 감시원의 감시 아래 치러진 대한민국의 첫 총선은 투표율 95.5%를 기록하며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됐고, 1948년 8월 15일,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1948 9 9, 대한민국 정부 출범 20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김규식은 누구?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호는 우사(尤史)이며 서울 출생.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가 1910년 국권 침탈이 되고 해외로 망명했다.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 총장이 되어 파리 평화회의에 전권대사로 참여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했고, 이해 9월 만주로 가서 홍범도, 지청천과 함께 대한 독립군단의 조직에 참여했다. 이 부대를 이끌고 헤이룽강을 건너 노령 자유시에 주둔했을 때, 헤이허 사변을 당해 레닌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감행하고 퇴각했다.

1935년 여름 중국 전토에 일본군 진격이 예상되자 재중 한국인 통일 독립 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5개 독립단체 대표들과 난징에서 모여 신익희, 조경한, 양기탁 등과 민족 혁명당을 조직했다. 의용대원을 모집하는 한편, 기관지 『민족혁명』·『우리의 길』 등을 발행했다. 1940년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어 김구 주석과 함께 광복군 양성에 힘썼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한 후 이승만·김구 등과 우익 진영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미·소공동 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간 우익을 표방해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입법 위원 위원장이 되어 좌우합작에 노력했다. 1948년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해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석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했고, 공직 활동에서 물러나 있다가 6·25 전쟁으로 납북된 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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