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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

by 휴이_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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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전쟁 발발의 배경

1945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한반도는 새 나라를 세울 희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계에 협조적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대립하기 시작했고 정치가들 사이에도 이념적 대립이 생겼다. 소련은 먼저 북한에서 토지개혁/지주와 자산가의 숙청/중요산업 국유화 등을 추진했다. 연합국이 통일국가를 수립할 방안으로 마련한 미소 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 문제 등을 둘러싼 좌우의 대립 끝에 결렬됐다. 북한에서는 공산당 주도 아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와 북조선 인민위원회 등을 거쳐 정부수립이 추진됐고 남한에서는 UN 결의에 따른 총선을 통해 정부수립이 추진됐다.

 

결국 1948년 8월과 9월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제가 들어섰다. 하나는 남쪽의 자유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북쪽의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그동안 1000여년 넘게 통일국가를 유지했던 한민족에게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두 체제가 한반도에서 사이좋게 양립하기에는 어려웠다. 무력을 써서라도 남한을 공산화하기를 원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무력 침공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북한은 일제로부터 거대한 중공업 지대를 물려받은 데다 일찌감치 1당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게다가 소련이 북한의 남한 공산화 계획을 강력히 지지했다. 반면 남한 이승만 정부는 새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북진통일 주장은 구호에 그쳤다. 결국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북한일 것이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부터 무력 남침을 꾀했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완정'이라는 단어를 무려 13회나 사용하면서 무력 남침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무력 남침계획을 다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북한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다고 하여 남침 계획을 만류하고 더 철저한 계획을 독려했다. 스탈린은 북한의 소총 15000정 각종 포 139문, T-34 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 무기를 지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 전쟁 문제를 중국의 마오쩌둥과도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1949년 4월 말에 북한 대표가 중국을 방문하여 스탈린과의 협의 결과를 알리자 마오쩌둥 역시 잠시 전쟁을 유보할 것을 권하고 남침 준비차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줬다.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김일성은 8월 다시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받고자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전면전은 시기상조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일성은 강원도 삼척 등 일부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 싶다고 청했다. 스탈린은 북한의 무력 남침보다는 남한 내 빨치산의 무장봉기에 의해 공산화를 꾀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남로당은 9월에 남한 각 도시에 경찰서와 관공서 군 사령부에 대한 공격과 같은 전면공세에 나섰다. 당시 개성 옹진 등 38선 주변 지역에선 빈번히 남북 간 전투가 벌어졌다. 우발적인 소규모 전투가 대규모 전면전으로 커질 수 있었기 때문에 1949년 10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38선 전투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후 38선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949년 하반기에 들어 공산 진영이 변화했다.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고 10월에는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서 중국을 공산화했다. 중국 공산화 시 미국이 개입을 포기하자 김일성은 북한의 남침 시에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낙관했다. 김일성이 1950년 1월 소련 대사를 통해 남침 공격을 위한 스탈린과의 회담을 청하자 스탈린은 여전히 남침을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며 자신은 이 문제로 다시 김일성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답신했다.

 

2. 전쟁을 승인한 소련

1950년 4월 초, 김일성과 박헌영은 비밀리에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비로소 중국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북한의 선제 남침 전쟁을 승인했다. 여기서 중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한 것은 소련이 시킨 전쟁이란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참전 등으로 북한이 독자적으로 전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도록 하여 소련의 지원 사실을 숨기려 했다.

마오쩌둥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기보다는 먼저 대만을 공산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의 결정을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기에 김일성을 지원하기로 동의했다. 이처럼 625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이 치밀하게 모의하고 계획한 전쟁이었다. 이후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중심으로 남침 공격의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0년 6월 16일, 스탈린은 남침 개시 일자를 6월 25일로 승인했다. 남침 공격계획을 세우면서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둥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미군의 참전 가능성이었다. 그 대책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은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재빨리 전쟁을 종결하기로 했다. 즉 전면 공격으로 재빨리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하여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막아 2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남침에 대비하지 못했다. 국군의 지휘부는 북한의 병력과 무기의 대규모 이동정보를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국군은 6월 초 사단장 등 지휘부의 대규모 인사이동을 했다. 또한 6월 23일 경계 강화 조치를 해제시켜 전방부대 병력의 1/3가량이 외출이나 농번기 휴가를 나갔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남침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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