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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작과 끝

by 휴이_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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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작

1980년 5월 광주, 전국 여느 주요 도시처럼 광주에서도 사흘 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행진이 진행됐다. 태극기를 펴든 학생들의 행렬에 대학교수들이 함께 행진했고 그 뒤를 따르는 많은 광주시민이 손뼉을 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10만 명의 시민과 학생이 이 운집한 516 횃불 집회,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이날 생전에 했던 마지막 연설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횃불처럼 타오르게 하자고 역설했다.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된 다음 날인 5월 18일, 대학 교문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대학을 지키고 있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에 반발한 전남대 학생들은 계엄군을 상대로 '계엄 해제,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였고, 금남로까지 이동했다. 금남로를 메운 시위대를 맞이한 것은 신우식 준장이 지휘하는 7공수여단 33, 35대대. 피눈물 나게 화려한 휴가는 이렇게 시작됐다.

 

18일 오후,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귀가하던 중 공수부대에 구타당한다.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서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지는 부상으로 이어졌고 결국 사망한다. 참혹했던 5월 18일에 분노한 시민들은 19일, 거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폭증한 수천 명의 시위대가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하게 부딪혔다.

 

진압의 증원군으로 도착한 11공수여단과 함께 오전 10시부터 골목을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대검과 곤봉으로 무차별 폭행을 시작했다. 오후 4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고등학생 김영찬이 최초의 실탄 사격으로 상처를 입는다. 저녁 8시, 광주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며 수만 명의 인파가 민주화의 물결에 합류했다.

 

5월 20일, 정부는 광주의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전달했고 공수부대는 여전히 시민들을 속옷만 입힌 채 마구잡이로 구타하며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그날 오후, 200여대의 택시와 버스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공수부대의 저지선으로 전진했다. 20만 인파가 순식간에 운집했고, 이날 저녁 처음으로 공수부대가 군중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즉각 3공수여단을 증파했고, 3공수 여단장은 실탄 장착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3공수여단의 무차별 살상은 극에 달했다.

 

저녁 11시,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4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시민이 상처를 입었다. 사건 발생 나흘 만에 국내 주요 일간지는 광주의 비극을 시민의 피해보다 진압군의 희생이 더 많았다고 조그맣게 보도했다.  이 거짓말은 시민의 분노를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만들었고, 이때 정부는 20사단을 광주에 또 증파한다.

 

2. 공수부대 집결

이로써 인구 73만의 도시 광주에 2만여 명에 육박하는 최정예 무장병력이 집결됐다. 시민들의 사망 숫자는 계엄군의 완벽한 임무 수행에 의해 조금씩 더 늘어갔다.

 

5월 21일 오후 1시, 시위가 끝나기만을 고대하던 시민들이 모여있던 전남 도청 앞 11공수의 총구가 시민들을 향했다. '설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을 잡았고,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군인들은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약 10분 동안 계속됐다. 사람들은 계속 쓰러졌고 공수부대원들은 빌딩 위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병원은 총상환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오자마자 죽은 환자, 얼굴에 총탄을 맞아 눈이 밖으로 빠져나온 환자 등, 병원은 아수라장이었다. 광주에서는 독재와 학살의 악취로 가득했다.

 

수많은 청년은 즉각 나주, 화순 등 외곽으로 빠져나가 도민의 총궐기를 호소했고, 경찰병력이 광주로 차출돼 텅텅 빈 지방의 무기고는 손쉽게 시위대의 손에 들어갔다. 무장한 시민군들은 각지에서 진압군과 교전을 벌였고, 수세에 몰린 신군부는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철수시키며 아주 짧은 평화가 광주를 찾았다.

 

5월 22일, 시민군은 광주시 외곽에 경비를 맡는 한편, 환자 수송, 주요고 나고 서 치안유지 등 자신의 임무를 나누어 맡았다. 광주로 유입되는 보급로가 차단됐기 때문에 물자 부족 현상은 점차 심각해졌지만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했다.

 

식품점과 슈퍼마켓, 약국 등에서는 음료수, 빵, 드링크를 무상으로 내놨고 주부들은 동네별로 쌀을 모아 김밥을 만들었다.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도 당시 광주 시내 46곳의 금융기관 중, 강도의 습격을 받았다고 기록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모든 주요 병원은 중상 환자로 넘쳤다. 일손과 의약품은 턱없이 부족했고 수술이 필요한 중환자들에게 피가 부족했다. 이 소문이 시민들 사이에서 퍼지자 수많은 젊은이가 병원을 찾아와 피를 내놨다.

 

이때 중앙일간지들은 거의 모두 광주를 무법천지와 살인, 방화, 약탈, 폭도가 날뛰는 도시로 지면을 가득 채웠고, 계엄 당국은 언론을 이용해 광주의 항쟁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발표해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훗날 보도 내용은 당연히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졌다.

 

상무관 안에는 부모·형제와 가족을 잃어버린 희생자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고, 이때 계엄군은 새로운 작전을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광주를 포위하고 조금씩 전진했다. 작전 중 사망자의 수는 계속 늘어갔다. 집회에서 수습 위원들을 중심으로 총기 회수가 시작됐지만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많은 젊은이는 무기 회수를 강하게 거부했다.

 

계엄군이 광주를 죄어들어 올 때 수습위원회의 내부 진통은 심각했다. 마침내 항쟁지도부가 교체됐고, 마지막 요구조건은 군이 과잉 진압을 사과하라는 것과 희생자 보상, 사후보복 금지, 계엄 해제와 진정한 민주 정부 수립 등, 일곱개 사항이었다. 하지만 군 측은 무기를 반납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어떠한 협상도 거부했고, 마침내 항쟁지도부는 최후 무기 반납 시한을 넘기고 만다.

 

5월 26일, 광주를 포위하던 계엄군은 시내 코앞까지 진출했고, 광주를 공격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무력 진압을 앞두고 신군부는 병력 사용에 관해 미국 측과 은밀히 조율했다. 미 항공모함 등으로 한국의 안전을 북한으로부터 보호하는 사이 2만여 최정예 부대는 광주로 진격했다. 26일 자정, 시내전화의 대기음은 끊기고 광주의 마지막 희망도 모두 끊겼다.

 

 

3. 광주민주화운동의 끝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고,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이 울렸다.

 

새벽 4시,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폭도들을 소탕하러 온 계엄군의 총소리가 광주 시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새벽 5시 10분, 진압 작전은 모두 종료됐고 8시 50분, 시내전화의 대기음이 다시 울렸다. 신군부는 이날 새벽 전차 18대, APC 장갑차 9대, 500MD 무장헬기 4대, 코브라 무장헬기 2대,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 각종 전투용 살상 무기를 총동원했다. 이렇게 신군부는 1212 반란에 이은 제2단계 쿠데타를 성공리에 마감했다.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은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이 되고 유신헌법의 변종인 8차 개헌으로 12대 대통령에 취임, 7년 동안 버젓이 독재를 자행하며 대통령 자리를 지켰다. 전두환에 이어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 광주를 밟고 일어난 그들의 권력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2011년 5월 25일, 유네스코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을 허위라고 결론지었고,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사망자 155명, 행방불명 81명, 부상 후 사망자 110명, 부상 등 기타 피해자 4,288명. 여전히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는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은 언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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