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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이유(517)

by 휴이_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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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 사망으로 생겨난 새로운 세력

1979년 10·26 사태,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무너진다. 곧이어 전국에 선포된 비상 계엄령.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혼란한 정국을 틈타 1212사태를 일으켜 군사권과 정치 실권을 장악했다.

10월 26일,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당한 전대미문의 사건.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됐으면 중앙정보부에서 장악해야 하는데 얄궃게도 중앙정보부장이 쏴 죽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합수부장은 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맡게 되었다. 육군 소장이 얘가 일약 사태조사에 사건처리에 핵심이 된 것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법률상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신군부라고 불렸다. 기존의 구 군부와 구별되는 군인들로 주로 대구·경북 출신의 친미 육사 11기 장교들의 모임이었으며,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이끌던 멤버였다.

그들도 처음부터 치밀하게 의도하진  않았지만, 운이 따랐다. 조사를 하다 보니 1026사태를 조사하다 보니 정승하 육군참모총장인 자기 상관을 조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을 협박해 1026사태 조사 명목으로 자기 상관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했다.

 

2. 1212 군사 쿠데타

이 과정에서 신군부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 권력을 탈취했다. 역사는 이 사건을 1212 군사쿠데타라고 부른다.

이듬해 신군부는 차츰 정부안에서도 요직을 차지하며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대한 우려와 조속한 민주화 추진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높아만 가고 5월 15일을 정점으로 서울역 앞에 모인 학생 10만 명과 시민들은 대규모 가두시위에 나섰다.

- 시위대의 구호, 1. 비상 계엄령 해제 2. 신군부 퇴진 3. 유신 헌법 철폐
- 시위대의 구호에 대한 신군부의 대답 '계엄령 전국 확대, 대학교 휴교령, 국회 폐쇄'

계엄군을 앞세운 신군부에 대한 강력한 저항은 광주에서 일어난다. 5월 18일, 휴교령에 반발하여 평화적 시위를 벌이고 있던 전남대학교 학생 2백여 명 앞에 선 특전사 공수부대원들. 작전명, '화려한 휴가'.

1980년 봄, 안개 정국 속에서 민주화를 바라는 온 국민의 목소리로 80년의 봄은 떠들썩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저임금에 시달려온 노동자들이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했고 대학가에서는 총학생회가 부활하는 등, 학원 민주화 운동이 점차 활발해져 갔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 언론자유 보장 등을 외쳤다.

 

3. 1980년 서울의 봄

이듬해 봄이 되자 야당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아직도 비상계엄 체제고 유신헌법 체제이기 때문에 민주화 일정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비상계엄상태가 6개월 이상 장기화하였다. 그래서 5월 14일, 5월 15일에 10만 명의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의 대학생들이(당시 전국에 있는 대학생을 다 합치면 20만 정도) 서울역 광장까지 평화 대행진을 했다. 각 학교의 대학생들이 전부 거리로 나왔다. 걸으면서 "계엄 철폐, 조속히 민주화 일정을 밝혀라."라고 하면서 민주화 대행진을 벌였다.

5월 13일, 14일에 학생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신군부에 집권 시나리오에 방해가 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역시 학생들이었다. 5월 14일, 전국 55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은 서울에서 중요한 결정을 했다. 15일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를 중단하고 학내로 복귀하며 정치권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체코의 프라하의 봄을 따라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하지만 평화의 열망과는 달리 전두환 신군부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충분히 훈련해온 충정 부대를 은밀하게 이동시키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육지가 계엄 상태였는 데 신군부가 5월 17일에 제주도까지 포함하며 전국계엄을 확대했다. 명령계통 때문이었다. 부분 계엄일 때는 대통령-국방부 장관-계엄사령관으로 명령계통이 내려오지만 되면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명령계통이 간소화된다. 당시 신군부 세력은 좀 더 손쉬운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군사 권력을 군을 동원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확대했다.



신군부 선포문 중

우리 정부는 국가를 보위하고 삼천칠백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안전 속에 성장과 발전을 바라고 있는 대다수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헌법과 관계 법령의 규정된 바에 따라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현 지역 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전환, 선포하고.



바로 이것이 신군부의 1212 군사 반란에 이어지는 제2의 쿠데타인 셈. 신군부의 집권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517쿠데타는 민주화를 바라는 온 국민에게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주요 야당 정치인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전방의 군병력을 후방으로 빼서 정부의 관공서나 대학에 중무장시켰다. 사실 이전에 한 달 전부터 군인들은 공수부대를 중심으로 매일같이 시위진압훈련을 했다. 이미 신군부는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5월 18일 아침. 등교했더니 철문이 다 잠겨져 있었다. 대학 교문에 중무장한 군인들이 대학을 지키고 있었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 시각에 광주 호남의 민심은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신군부가 영남 정치인들은 가택 연금시키고 김대중은 구속했다. 그래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만들어지고 사형판결이 내려지게 되면서 광주, 전남의 민심은 더 흉흉했다.

5월 18일에 전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신군부는 즉시 광주에 향토사단 20사단, 5공수, 7공수, 9공수를 증파했다.


황한식 부산대 교수 :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야말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 그리고 진보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놓은, 참으로 유감스럽고 불행한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없었더라면 바꿔말하면 민주화의 열망에 가득 찬 국민의 요구를 수용했더라고 한다면 그 수많은 죽음도 피 흘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 민주 역사도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17 서울의 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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