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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독립을 향한 안창호의 열망과 리더십

by 휴이_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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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시정부를 위한 안창호의 노력

임시정부의 대표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는 새로운 대안을 추진했다. 전 국민의 의견을 결집해 독립운동의 방략을 고쳐 세우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한 것.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의 역할을 하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도산은 더 큰 규모의 국민 의지를 모을 수 있는 국민대표 회의를 통해 임시정부를 보강하고자 했다. 남의 나라 땅에 모여 조국의 운명을 의논하는 일은 산 넘어 산이었고, 비용 마련과 교통 문제 등으로 네 번이나 연기되며 2년의 준비기간을 가진 끝에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다.

민족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국내 13도 대표들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멕시코까지 국내외를 대표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라 안팎 135개의 독립운동 단체가 참가, 최종 확정된 125명의 국민대표. 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회의가 거듭될수록 참석 대표들 사이에 분명해진 의견 차이. 임시정부 존폐를 둘러싸고 개조파의 주장과 창조파의 주장이 날 선 공방을 펼쳤다. 임시정부의 잘못된 점만을 고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대신하는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자는 창조파. 제39차 회의가 열린 3월 13일 임시정부 개조안이 상정되며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됐고, 결국 3월 17일 국민대표회의는 휴회에 들어갔다.

회의는 열리지 못한 채 난항을 거듭했고, 한인들이 모여 살던 조계에도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겼다. 어린아이들조차 어른들을 흉내 내어 서북 출신 아이들은 서북 척후대를, 기호 출신 아이들은 화랑사라는 단체를 만들어 끼리끼리 모여 놀았다.

기호 출신과 서북 출신 갈등의 뿌리는 깊었고, 자연스레 대를 이어 학습됐다. 도산은 아이들의 세계만이라도 화합되길 원해 조계 아이들의 단체를 통합해 소년 동맹을 결성하고 아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갈등을 치유하고자 했다.

6월 5일, 제72차 국민대표 회의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백방으로 타협과 양해를 구하였으나 더 일보도 경진할 수 없이 되었다. 개조파들은 탈퇴를 선언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국민대표회의는 총 74차례 회의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라 통일하고자 했던 국민대표회의는 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 역사상 최대의 끝장토론이었던 국민대표회의는 우리 독립운동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2. 독립운동 세력을 넓히기 위한 계획

1913년, 도산이 미국에서 조직했던 청년 수양 단체 흥사단. 도산은 실패에 포기하지 않고 상해에 흥사단 지부를 두어 임시정부 지원과 독립운동 세력 확장에 앞장섰다. 1920년 상해 시내를 가로지르는 전차 검표원은 대다수가 한국인, 검표원 대부분은 흥사단원이었다. 비교적 벌이가 괜찮았던 그들은 흥사단 원동위원부와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적 후원을 담당했다.

독립운동의 준비단계로 사람과 재정을 꼽은 안창호는 '전쟁을 하자는 사람은 많아도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며 흥사단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묵묵히 실천했다. 도산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각지를 다니는 동안에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만한 이상촌 후보지 물색에도 전념했다.


이 부족한 사람이 국민에게 빚 지은 것이 많은데 원동에 왔다가 우리 국민을 위하여 아무 기초도 세우지 못하고 공연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이라 이처럼 못 갑니다. 지금의 나는 원동의 우리 사업의 근거지를 하나 세우려 합니다. 몇 달 동안 산과 들로 돌아다닌 결과 기후와 산천과 토지가 좋은 것을 하나 보았는데 과연 살만한 곳인지 더 조사하나이다.

- 1924.1.13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도산은 신민회 시절부터 추진해 온 이상촌 개척 운동이 위기에 봉착한 독립운동계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도산은 이미 공립협회를 만들 때 미국에서 모범적인 한인촌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이상촌을 중국인들에게 박해받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의 국민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3. 6년 만에 미국 땅을 밟은 안창호

1924년 12월 16일, 도산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상해에 파견돼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 지 6년 만이었다. 도산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가 미주 한인들의 재정을 독점하고 송금을 중단해 재정적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를 위해 인두세 1원씩을 지원할 것을 호소했다. 미국을 떠날 때보다 늘어난 동포와 유학생들을 만나기에도 그의 일정은 빡빡했고, 그의 삶에서 가족은 늘 민족 뒤에 있었다.


나는 6년 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왔다고 하나 당신과 아이들과 같이 있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또 멀리 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때론 처참합니다. 내 일신에 아무 낙이 없더라도 우리의 바라는 일에 터가 잡히는 것을 보면 위로가 되겠습니다. 

- 1925.5.23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1926년 5월 16일, 상해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도산을 국무령으로 선임한 임시 의정원. 그는 취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을 향한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1929년 국내에서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도산 안창호는 전 민중이 중심이 되는 통일된 지도기관을 결성하자고 다시 한번 주장했고, 이는 한국 최초 정당 조직체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는데 큰 촉진제가 되었다.

내가 가진 주의는 나로도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가 없는 것이오. 오직 일본을 적으로 삼고 민족혁명을 하여야만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그러니 이름은 지을 대로 지으시고 다만 일만 같이합시다. 대한의 백성이면 누구나 민족혁명에 합할 수 있는 것이오.
- 독립신문 1926.9.3

안창호는 어떤 주의와 노선도 초월하고 융합할 수 있는 제3의 노선을 통해 민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안창호는 항상 분열이 있는 곳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분열을 치유하고 대동단결하고자 했던 리더의 일. 도산은 한평생을 그랬다. 한평생을. 그것이 도산이 가지고 있는 리더십의 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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