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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안창호의 노력과 임시정부의 위기

by 휴이_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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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

"우리의 혁명은 민족혁명이외다!"

1919년 3·1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마침내 독립운동을 전개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해 5월 25일 상해를 찾았다.

1842년 난징조약 결과 일찍 개항한 상해는 그 무렵 중국의 경제 중심지이자 아시아 최고의 자유 무역항으로 성장해 있었다. 열강들이 설치한 조계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조계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산 안창호가 도착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 청사는 안창호가 미주 교포들에게 모금해 온 자금으로 마련됐고, 곧 정부의 외형을 갖추었다. 3·1운동 이후 억눌렸던 민족의 욕구가 다시 끓어오르자 국내·외 8곳에서 조직된 각각의 임시정부. 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둔 안창호는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정부 통합작업에 들어갔다.


'독립운동이 일어나 우리나라 최고기관을 세우려 할 때 서로 교통이 불편하므로 동서에서 기관(정부)이 일어났으니 오늘날은 이를 다 통일해야겠소 

- 1919.6.25 부인 이혜련에게 보내는 편지


3·1운동 이후 세워진 8개의 임시정부 가운데 안창호를 요원으로 선출한 임시정부는 6곳. 이때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국내에 조직된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로 임명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대통령 직함을 사용하며 외교활동을 시작했고, 두 개의 정부에서 파생될 혼란을 우려한 안창호는 미국의 이승만에게 상해 임시정부를 통합정부로 헌법을 개정한 후 대통령으로 행사할 것을 요구했다.

간절했던 안창호의 요청. 하지만 이승만은 거절했다. 정부 통합을 위해 계속 고심하던 도산은 정치적 이념이나 노선의 차이를 수용하고 좌·우파를 아우르는 통일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의 이동휘를 설득해 연해주 세력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시킨다.

1919년 9월 11일, 드디어 출범된 통합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위 선임,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을 맡았다. 내무, 재무, 법무 총장에 내정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도 서둘러 상해를 찾지만 정작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이승만은 상해에 오지 않았다.

 

2. 흔들리는 임시정부를 진정시킨 안창호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생명을 담보로 어려움을 겪으며 임시정부를 이끌어야 했지만 총지휘해야 할 대통령이 미국에서 편안하게 대통령으로 산다는 현실. 결국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직접 상해로 올 것을 요구했다.

교통 총장과 내무 총장으로 임명된 문창범과 박용만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듣고 취임을 거부, 독자노선을 걸었다. 상해 임시정부 임원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대통령 불신임안. 도산은 이승만 박사를 위함이 아닌,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지를 위해 도산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이혼할 수 없는 아내라면 분을 사다가 발라 주면서라도 같이 살아야 한다."
임시정부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미국에 체류 중인 이승만은 재정권을 장악하고 외교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갔다.


나는 능력 없는 사람으로 한동안 큰일을 혼자 맡아서 지냈고 여러분이 모인 후엔 좀 나을까 하였더니 다시 복잡하여 분주함이 마찬가지외다. 내 평생 처음으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 1920.2.23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1920년 안창호는 구체화한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랴 방침을 고쳐 전쟁하라 함이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침이 독립전쟁임을 확실히 공표한 것. 독립을 향한 도산의 시선은 멀고 깊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립 이후까지 생각한 장기적이고 원대한 민족운동 방략을 제시했다. 단계별 준비사항, 기초 단계 - 민족의 대동단결, 준비단계 - 인재 양성과 재정 확보. 이를 통한 목표가 바로 독립전쟁이었고, 도산은 독립국 건설 대업에서 한단께 더 나아가는 민족혁명을 최고의 목표로 두었다.

그는 단순히 국권 회복과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향후 후손에게 물려줄 국가는 어떤 국가로 건설되어야 하는지까지 생각했다.

 

3. 파국으로 치닫는 임시정부

1920년을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배경에는 이동휘의 무장투쟁 기반이 있었고,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 임시정부 산하의 군대 조직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해 가을, 일제는 간도 지역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과 한인사회를 대대적으로 학살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리더의 부재로 표류하던 임시정부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1920년 12월 5일, 마침내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비폭력 외교 노선을 내세우며 자신의 정부 운영 의지를 고수했다. 임시정부 내 무장투쟁 세력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의사를 천명한 것이다.


나는 20년 동안 내 민족을 위하여 고생도 다소 받았고 남의 시비와 의심도 받았다 하나 남녀 동포에게 믿음과 사랑을 받은 것이 더 많소. 그 믿음과 사랑을 무엇으로 보답할는지. 스스로 황공하며 희생하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항상 멀리 두고 외롭게 지내는 것이 참 아니 되었소이다. 그러나 불쌍한 우리 동포를 위해 잘 참고 스스로 안위하소서. 

- 1920.8.3. 부인 이혜련에게 보내는 편지


임시정부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대통령 행세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이승만의 행동에 국무총리 이동휘는 화를 참지 못해 큰 마찰을 빚었고, 연해주로 돌아갔다.

1921년 1월 24일, 이동휘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고 5월 12일에는 안창호도 노동국 총판을 사임하면서 임시정부를 탈퇴. 5월 28일, 이승만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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