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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안창호

by 휴이_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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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국 체포된 안창호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 울린 굉음. 소리의 진원지는 매헌 윤봉길의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날 오후, 도산의 체포 소식이 들려왔다. 일제는 윤봉길의 의거 배후세력 소탕을 빌미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고, 원래부터 전범국의 경찰에 쫓기던 그 순간에도 도산은 16살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두의 만류에도 이유필 선생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아들에게 소년 동맹 체육대회 지원금 5원을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이유필은 사람을 시켜 안창호의 숙소로 찾아가 위험을 알리라고 했으나, 얄궂은 운명은 두 사람의 길을 엇갈리게 했다. 도피할 시간이 있었지만, 약속의 무게를 신념으로 알던 안창호 선생은 결국 소년을 만났고, 이미 조계를 둘러싸고 있었던 전범국 형사들과 프랑스 조계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목숨같이 지키려던 신념. 도산은 이유필로 오해를 받아 영문도 모른 채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의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체포된 이후 국내로 압송된 도산. 1910년 조국을 탈출해 망명길에 오른지 23년 만의 일이었다. 도산은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되었고, 4년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했다.


내가 일평생 당신에게 위로와 기쁨을 준 것이 없었는데 이제 느지막이 와서 근심과 슬픔을 주게 되니 당신에게 미안함이 끝이 없습니다. 나와 같은 길에서 걸어가다가 나보다 철창 밑에서 고생한 사람이 얼마입니까. 이제 내가 이만한 고생을 받는다고 특별히 슬퍼하고 화날 것이 무엇입니까. 
- 부인 이혜련에게 보내는 편지


1935년 2월 10일,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형기를 22개월 남기고 가출옥한 도산. 전범국의 민족 말살 정책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던 도산은 쇠약하고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고향 근처 대보산 송태산장에 기거하며 도웅회의 민족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세력이 커지는 동우회를 보고 총독부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동우회 소집 통지서를 일본어로 쓰고, 모든 회의도 일본어로 진행하라고 강압했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던 중 전범국 경찰에 의해 동우회는 총검거 당했다.

 

2. 독립에 목숨을 바쳤던 안창호

송태산장에서 다시 체포된 도산. 조사 중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로 위급한 상태에 빠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12월 24일 급히 도산을 보석시켜 경성제국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했다. 위하수증·간경화·만성기관지염. 이가 다 빠지고 피부병을 앓고 있던 도산. 평생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독립만을 울부짖은 도산에게 너무나 가혹한 병들이었다.

1938년 3월 10일 0시 5분, 삶과 목숨을 모두 조국과 독립에만 바친 도산 안창호의 숨소리는 60세를 일기로 정지했다. 그리고 1941년 11월 17일,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는 동우회 사건 전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여객기도 없던 시절, 도산은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다섯 번, 대서양을 한 번 건넜고, 37년간 12개 나라, 120여 개의 도시를 두루 돌아다녔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해외 한인 공동체를 연결하고 이상촌을 세우기 위한 발걸음은 쉼 없었다.

낯선 곳 필리핀까지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이상촌을 찾으러 다닌 도산. 그는 일생을 통해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고 그 어디에도 자기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었다. 그의 집은 대한의 독립이고, 그의 가족은 모든 동포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남겼던 리더십과 독립의 열망은 약 100년 후,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한 줌의 부스러기가 되었다.

도산이 다시 묻는다,
"오늘 대한의 주인 되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어라."



3. 호를 도산이라고 쓴 이유

1898년 11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 및 성토했고, 6개 조의 정치혁신안을 건의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해산되었고, 안창호는 숨어있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 운동에 매진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세웠고, 주위의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 사업을 진행했다. 1902년, 이혜련과 결혼했고 그해 11월 4일 아내 이혜련과 함께 배편으로 출국했다. 도쿄에서 1주일 체류 후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으로 갈 때 일몰 중 큰 바다에 홀로 솟아있는 하와이섬의 모습을 본 안창호는 자신의 호를 도산이라고 지었다.


4. 신민회의 역사

1907년 4월, 안창호의 거사로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과 서울 지역의 인사들이 모여 창립했다. 신민회가 결성되었을 때, 국내의 상황은 통감부 및 일제의 감시와 신문법, 보안법 등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숨죽여 지내던 시기였다. 이렇게 정치활동의 한계를 느껴 애국 계몽의 틀을 깨고 투쟁적이면서 적극적인 구국운동을 시작하고자 결성한 단체가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목표했고, 사회 각층 인사를 내세워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비밀단체였지만 그 활동은 대부분 합법성을 띤 활동이었다.

신민회는 신식 학교 설립과 교육 계몽, 신식 학문 수용을 지향했고, 만주 지방에 한국 독립군을 창설할 훈련기관 설립 및 훈련기관의 훈련장 마련,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신민회는 경성에 와 있는 지방 인사들을 이용해 각 지방의 개혁 운동가들의 회원 가입을 유도했다. 신민회는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 지부를 만들고 회원 수를 점점 늘려갔다. 근대 이후의 공화정체를 제창한 대표적 조직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 및 공화정체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했다.

신민회는 실력 양성론과 독립 전쟁론에 따라 공화정제를 이상적인 목표로 두었다. 이는 근대 최초로 '민주 공화정'을 이상향으로 지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민족 교육 계몽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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