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립을 위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안창호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가로 돌아와 사무실을 얻은 안창호는 친목회에서 발전된 공립협회를 조직했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의 경험으로 안창호는 뜻을 같이하는 임준기, 정재관, 송석준, 이강과 함께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공립협회 초대 회장에 선임됐다. 안창호는 첫 사업으로 한 달에 두 번씩 편집하고 인쇄하는 공립신보를 발행, 구국 언론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한인 이주민들은 공립 신문을 통해 일자리 등의 정보를 교류하며 한인타운의 구심체로 성장했고, 공립신보는 미주를 물론 국내, 만주, 러시아까지 배포됐다. 그 당시엔 '윤독(돌려 보는 풍습)'이 있어 신문 한 부가 들어갔다는 것은 그 일대의 지식인들이 모두 본다는 의미였다. 공립신보는 사실상 들어오는 족족 판매 금지를 당할 정도로 내용과 의미가 가히 혁명적인 신문이었다.
1904년 말, 공립협회는 하와이 노동계약이 끝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미주 본토로 몰려든 한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원하는 대로 일자리를 주선하는 등 한인들의 자립을 돕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민자들의 65%가 문맹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안창호는 민족의식과 영어를 지도하며 일자리 알선을 도왔고, 한인 친목회로 시작된 한인 단체는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를 중심으로 서부 일대에 지부를 둘 만큼 발전했다. 안창호는 나 자신을 혁명하는 것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민족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준비와 계획을 구상했을 때, 그의 나이 29살. 1905년, 첫아들을 얻은 안창호는 이름을 필립으로 지었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의 간절함, 나라가 반드시 독립되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내가 오늘 수만 리 대양을 다시 건너 고국에 다녀오려 하는 것은 무슨 경치를 구경하려 함이 아니오. 오늘 우리나라가 멸망되고 우리 2000만 동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무엇이든지 내 힘으로 우리나라와 우리 동포에게 도움이 있게 할까 하여 다녀옴이라.
-1907년 1월 7일 부인 이혜련에게 보내는 편지
안창호는 식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열등한 나라라는 일제의 주장이 거짓임을 주장하는 것이 독립의 첫걸음이라 생각하여 1907년 2월 20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대한매일신보사, 상동 청년회, 서북지역 인사들과 조직한 신민회. 臣(신하 신)이 아닌, 新(새로울 신)을 썼던 신민회는 국민의 발견,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도산이 꿈꾸던 나라는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국가였다.
2. 끝내 망명을 선택한 안창호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울린 6발의 총성.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일제는 평양 대성학교에 있던 도산을 체포해 용산 헌병대에 구금시켰다. 도산을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이 배후 인물로 지목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더 이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도사는 망명을 선택했다. 1910년 8월 29일, 도산이 망명길에 오른 그 해 일제는 강제로 한일병합을 강행했고, 독립전쟁 근거지 건설을 열망했던 안창호는 국경과 가까운 만주와 연해주 답사에 나섰다. 절망스러운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이곳의 땅값이 매우 헐하니 얼마간 사두면 큰 이익은 나지 아니하나 장래를 생각해 한 곳 장만하면 든든할 터이니 혜련이 돈을 보내면 매우 좋겠소.
- 1910년 2월 17일, 부인 이혜련에게 보내는 편지
당시 신민회 회원들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한다는 계획을 비밀리에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북만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 위치한 봉밀산 시찰에 나선 도산은 일제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임을 확인하고 이 일대의 독립기지 건설을 구체화했다. 1909년 가을, 도산은 김성무와 이강을 파견해 황무지를 사 개간하고 집을 짓고 학교를 꾸리며 청년들을 조직해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도산의 희망이 뿌려졌던 봉밀산은 한인들의 삶터이자 만주와 러시아를 넘나들던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었고, 100여 년 후 지금까지 한인들이 살 수 있는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도산의 희망이 현실이 된 것은 미주 한인들 독립의 염원 덕분이었다. 해외인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치하기 위해선 돈과 땅이 필요했고, 무기도 음식도 국적도 없는 해외 한인들의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미주에서 태동 실업 주식회사를 세웠다.
미주 한인들의 투자로 시작된 봉밀산 개척사업. 개척의 실무자였던 김성무는 안창호에게 개척 상황을 세세히 보고했고, 봉밀산엔 조선인 마을 세 곳, 500여 가구가 생활 터전을 꾸렸다. 봉밀산의 개척 과정은 안창호가 꿈꿨던 이상촌 건설 운동의 첫 시작이었다. 한인들의 생활 터전이자 독립운동 기지로 삼을 마을, '이상촌'. 유토피아적 의미보다는 모범촌의 의미에 가까웠다.
고국이 망하는 것을 보고 나 혼자 잘 살려고 고국을 버리고 가는 것은 인정에 차마 못 할 일이라. 내가 혹 나라를 위하다 위태한 곳에 들어갈지라도 놀라지 마시오.
- 1911년 5월 3일,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3. 해외 망명정부의 기능을 선포한 대한인국민회
안창호는 이상촌 후보지 물색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고, 러시아를 경유해 베를린,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목숨을 담보로 한 거침없는 여정. 안창호가 꿈꿨던 것은 가장 자유로운 나라와 이상촌 건설. 꿈을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평생 쉬지 않고 한인들을 위해 행보를 보였고, 도산은 무려 멕시코까지 탐방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 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를 발행해 일제 침략을 비판하는가 하면 국내외 동포들의 소식을 실어 한인 운동 사회의 독립을 주도했다. 1912년 11월 20일,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망명정부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선포했다. "우리는 나라가 없으니 우리의 단체를 무형 정부로 인정하고 자치제를 실시하여 장래 국가 건설에 공헌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일하는 단체는 오직 해외에 대한인국민회만 있을 뿐이다."
국권이 없는 조국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한국을 보존하려는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열고 해외 한인 최고기관이자 무형 정부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했다. 중앙총회장에 선출된 안창호는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지역과 이념을 초월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 산하의 북미·하와이는 물론 멕시코, 시베리아, 만주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방회를 갖춘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한다. 국민이 주인이 되기 위해 붙인 '국민회'.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려면 필요했던 권리와 의무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대표적으로 납세와 병역의 의무였다. 일본인으로 오해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던 한인들은 대한인 국민회를 중심으로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고 해외 한인들과 연계해 독립운동자금을 담당했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는 미국 정부와 교섭해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아도 되는 자치권을 허가받았다. 이후 여행권이 없는 유학생이나 정치 망명자도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미국 입국이 허용됐다.
세계 각지의 한인들이 조국 독립이란 목표 아래 하나가 됐고, 그 중심에는 늘 도산 안창호가 있었다. 1919년 3월 9일, 전보를 통해 3월 1일 독립 만세 소식이 전해졌고 안창호는 대한인 국민회를 중심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미주 한인들도 동참할 것을 결의한다.
마침내 독립운동을 전개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선정된 안창호는 중앙총회에서 모금한 6,000달러를 가지고 상해로 출발한다. 도산 안창호의 거대한 조국 독립 마스터플랜은 상해임시정부를 통해 그 위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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