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너지기 시작하는 오스트리아군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카포레토를 장악했다. 10일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무려 100km를 진군했다.
1917년 11월 초,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군대의 잔해 사이를 지나갔다. 결국 27만 5천 명의 이탈리아 병사들은 굴복했다. 이탈리아 병사들은 외쳤다. "우리의 적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카도르나 장군이다!"
카도르나 장군은 말했다. "나의 군대는 파업에 돌입했다." 그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카포레토에서의 패배로 반란의 분위기가 퍼지자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철수할 것을 우려한 연합군의 지도자들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1917년 11월 15일, 그들은 원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원군은 구세주로 추앙받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로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 병사 10만 명이 떠났다. 곧이어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막고 수많은 포로를 잡아들였다.
모든 게 지긋지긋한 오스트리아의 병사들. 그들 사이에선 반란과 독립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카를 1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만났다. 두 황제는 사태 파악을 위해 전선으로 떠났다. 반란이 퍼질 것을 크게 걱정한 카를 1세는 계속 평화를 제의하며 협상하고자 했으나 독일 황제는 달랐다. 그는 여전히 승리를 꿈꿨다.
독일 황제와 그의 장군들은 미국이 전투 준비를 마치기 전에 승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러시아를 전쟁에서 몰아내고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서부전선으로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독일군을 지휘하는 루덴도르프 장군은 이를 염두에 두고 러시아의 핵심 정치 선동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하는 것을 도왔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바로 레닌이었다. 공산당의 집권을 주장하는 글을 썼던 레닌은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17년 2월, 러시아 황제를 퇴위시킨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전쟁했고, 독일은 교묘하게 레닌의 정당에 여행 자금을 지원했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동맹의 원인은 루덴도르프가 레닌의 뜻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레닌이 전생에서 러시아를 빼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러시아 국민들이 고통과 기근에 시달리고 군대는 혼돈에 빠진 가운데 레닌은 "평화, 빵, 자유. 민중에겐 이 세 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제국주의적 학살을 연장했다며 비난했다.
2. 몰락하는 러시아 제국
마침내 1917년 11월 7일, 러시아 달력으로 10월 25일, 레닌은 '10월 혁명'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에서는 갑자기 임시정부가 잔인하게 체포됐고, 무자비한 독재 정부가 수립했다. 10년 전인 1905년 혁명 당시, 레닌은 "테러는 사회 위생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 정책의 초기 희생자들에는 황제 일가가 포함돼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위대한 러시아 제국이 가장 먼저 몰락했다.
1917년 12월 15일, 참호에서 빠져나온 독일과 러시아의 병사들이 가시철조망을 넘어 다정한 인사를 나눴다.
모스크바의 새로운 공산당 정권이 막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내는 협상에 착수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우리는 제국주의 강도들과 타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회담이 이뤄졌다. 1917년 12월 22일, 독일군은 공산주의자들을 비웃음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들은 강제로 이루어질 영토 양보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레닌은 시간을 벌려면 영토가 몰수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황실에 충성하는 러시아 군대가 내전에 휩싸이는 동안, 혁명을 확고히 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혁명이 전 세계로 퍼지길 소망하며 적군과 3개월 동안 협상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그리고 불가리아까지. 모두가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했다.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하자 레닌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하나인 트로츠키를 보내 전적으로 굴복하도록 했다.
1918년 3월 3일,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는 15만 제곱 km의 영토를 빼앗겼다. 발칸 지역뿐 아니라 독립한 폴란드, 볼셰키비와의 전쟁에 돌입한 우크라이나까지 잃었다. 루덴도르프는 성공했다. 그는 많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독일의 빌헬름 2세와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는 새로운 판을 짰다.
1918년 3월, 지치고 굶주린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200만 병력을 운집시켰다. 이제 독일군은 적군보다 수가 많아졌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1914년의 꿈을 실현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압도하는 병력을 갖춰 모든 전선에서 연쇄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는 거듭 강조했다. "우리는 미국군이 병력을 쏟아붓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1918년 3월 21일, 그는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루덴도르프의 기습부대는 단기간 포격으로 공격을 준비한 후 적진에 침투했다. 참호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연합군의 전선이 뚫렸다. 그리고 불과 3일 후 독일군은 파리에서 12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공습경보기와 대피소가 있음에도 파리 시민 200명이 독일 비행기의 폭격에 목숨을 잃었다.
1918년 3월 29일, 더 이상 파리 상공에 독일 비행기는 없었다. 그리고 파리엔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가득했다. 포탄 하나가 41명의 사망자와 68명의 부상자를 만들기도 했다.
독일군은 120km 거리에 있고 가장 큰 대포의 사정거리는 32km가 넘었다. 겁에 질린 파리 시민들은 아이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냈다. 바로 이 대포가 불과 120km 거리에 있었다. 독일 황제의 비밀 병기인 이 대포는 총열의 끝과 끝을 붙여 만든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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