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덩케르크에서 무사히 철수한 영국군과 프랑스군
또 다른 1차 세계대전의 영웅, 84세 페탱 원수를 부총리로 임명했지만 페텡은 곧 레노에게 등을 돌렸다. 하지만 베이강에게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덩케르크 쪽으로 전면 후퇴를 명령했다. 히틀러는 퇴각하는 이들을 그냥 보내줬다. 이제 히틀러는 평화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또 어떤 꿍꿍이를 감추고 있을까.
해변을 가득 채운 40만 병력은 희망을 잃고 흩어져 있었다.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바다 너머뿐이었다. 처칠은 물에 뜰 수 있는 모든 선박을 동원해 40만 병력의 구조를 지시했다. 프랑스군은 덩케르크 외곽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독일군을 막고 있었다. 괴링은 여기에 공군 폭격기를 투입했다.
그런데도 영국군 21만 8천 명, 프랑스군 12만 명은 철수에 성공했다. 구조된 영국군과 프랑스군. 하지만 그들은 모두 누더기 상태였고, 프랑스군은 조국을 지키러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영국군은 재무장 센터로 보내져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영국 국민은 덩케르크 구조에 갈채를 보냈지만, 처칠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전쟁은 철수로 이길 수 없습니다."
1940년 6월 초, 며칠 사이 '덩케르크 정신'이 일었다. 이제 영국인들은 전쟁의 무자비함과 나치 독일의 파괴력을 실감했다. 전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 전국이 무장되었다. 6월 4일, 패배주의자들과도 싸워 온 처칠이 입을 열었다.
"잊을 수 없는 일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상륙 지점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6월 4일, 독일은 덩케르크를 점령했다.
영국군은 거의 모든 장비를 남겨둔 채 철수한 상태였고, 독일군에겐 엄청난 전리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결국 프랑스는 무너졌다. 하지만 레노 총리와 당시 국방 차관이었던 드골은 전쟁을 계속하길 바랐다.
2. 움직이기 시작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1940년 6월 10일,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국민을 향해 발표했다. "방금 영국 대사와 프랑스 대사로부터 전쟁 포고문이 전달됐다." 무솔리니는 프랑스로부터 론 계곡과 마르세유 계곡을 비롯해 코르시카섬과 튀니지의 무장 해제를 얻고자 했다. 이에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배신당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 산악 사단은 무솔리니의 공격을 막아냈다. 노르망디부터 달려 온 롬멜 장군의 군대가 루앙에 입성했다. 파리는 무장 해제를 선언했다. 이는 바르샤바나 로테르담처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 파리를 독일에 그냥 넘기겠다는 의미였다.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옮겨갔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파리 시민들은 달아났다. 수백만 프랑스인들이 마지막 보루인 루아르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비행기에 맞설 강력한 보루는 어디에도 없었다.
1940년 6월 14일 새벽. 드디어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나치의 깃발이 파리 전역에 휘날렸다. 독일 점령군은 먼저 버려진 정부 기관에서 중요한 문서를 수집했다. 프랑스 스파이, 유대인, 프리메이슨 단원의 명단과 1919년 독일에 치욕을 안겼던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 등이 히틀러에게 보내졌다.
루아르로 건너가는 다리는 폭파됐고 민족대이동은 중단됐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싸움이 중단되는 것뿐이었다. 보르도에 있는 페텡 역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 했다. 독일은 남쪽으로 거침없이 전진했다. 한때 막강했던 프랑스 육군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한 달 만에 전사한 프랑스군은 10만 명. 이는 전쟁 사상 가장 치열했던 1차대전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무려 185만 명의 병사들이 전쟁 포로가 됐고, 장교 3만 6천 명, 장군 176명도 전쟁 포로 신세가 됐다. 이어서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차례로 일어났다. 먼저 1940년 6월 16일, 레노가 보르도 각료 회의 책략에 말려 전격 사임했고, 그의 후임으로 페텡이 프랑스 정부의 수장이 됐다. 다음날, 페텡은 파리에 남은 시민들에게 목소리를 냈다. 베르됭 전투의 영웅 페텡은 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서 가슴 아픈 결정을 한 건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 라디오는 항복을 선언하는 이 연설을 통역해 방송했다. 독일군은 크게 환호했다.
1940년 6월 18일, 드골 장군이 런던에 도착해 휴전 폐기를 선언했고 며칠 후 새 연설을 녹음했다. "프랑스의 명예는 우리의 동맹군들과 함께 전쟁을 계속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한편, 히틀러는 모스크바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
1940년 6월 22일, 히틀러는 파리 근교의 콩피에뉴에 도착했고, 프랑스에 패전국의 수치를 안길 상황을 연출했다. 히틀러는 독일의 패배를 확정했던 1918년 휴전 조약 서명 당시 사용했던 열차를 가져왔다. 그의 복수는 완벽했다. 히틀러는 그 열차 안에서 프랑스 사절단 대표로 온 헌징거 장군을 만났다. 그곳에서 독일 측 통역은 "프랑스가 이유 없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통렬한 비난문을 읽었다.
비난문이 전달되자 히틀러는 프랑스 사절단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다. 이어 프랑스 대표단은 휴전 조건을 받았다. 그중에는 프랑스로 도피한 반나치 독일인을 모두 넘긴다는 내용이 있었다. 헌징거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독일은 딱 잘라 거절했다 헌징거는 휴전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르도에 있는 정부에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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