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의 손에 들어간 프랑스
"헌징거입니다. 끝났습니다. 저를 이해하시죠?"
"그럼, 이해하네. 잘 처리해 줘서 고맙네."
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상징했던 프랑스의 기념물들은 곧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20년 전 50만 프랑스군이 전사했던 베르됭에는 나치의 깃발이 걸렸다. 히틀러도 방금 마지노선을 점령한 병사들을 방문하며 프랑스를 비웃었다.
스트라스부르에 입성해 엄숙하게 성당에 들어간 히틀러. 그가 약속했던 대로 알자스와 로렌 지방은 독일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은 탱크 2,000대, 대포 5,000문, 소총 300,000정과 4,000,000발에 달하는 전리품을 얻었다.
프랑스의 모든 공장과 항구, 국가 재산은 독일의 손에 들어갔다. 전쟁을 선포한 프랑스는 그 대가로 하루에 1억 달러에 달하는 점령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헌징거 장군은 휴전 조약을 실행할 위원회의 첫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히틀러는 군대 투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프랑스의 주권을 유지했다. 프랑스 정부를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최소한의 병력으로 치안을 유지하게 했다. 프랑스는 둘로 나뉘었다.
독일은 항구가 들어선 대서양 해안과 북부를 차지했고, 이탈리아는 지중해 지역을 통제하며 알프스를 따른 좁은 지역들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자유 지역으로, 비시에 프랑스의 새 수도가 들어섰다.
7월 초, 페텡 총리는 정부 부처와 호텔로 들어섰다. 분위기는 매우 절망적이었다. 비시 정부에게는 여전히 많은 식민지와 막강한 해군이 있었다. 히틀러는 그들이 영국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무장을 해제하고 항구에 계속 정박하고 있으라고 요구했다. 반대로 처칠은 선박들이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 영국 해군에 명령을 내려 제압하려 했다.
1940년 7월 3일, 영국 해군은 프랑스 최대 해군 기지 중 하나인 알제리의 메르스엘케비르로 향했다. 처칠은 침착하게 프랑스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영국의 편에 서서 스스로 배를 침몰시키든, 카리브해까지 호위받고 가서 무장해제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곧바로 영국은 폭격을 개시했다.
프랑스 전함 두 척이 심하게 부서졌고, 한 척은 침몰했으며 1,297명의 프랑스 해군이 전사했다. 처칠은 영국 국민과 전 세계, 특히 미국에 굳은 결의를 보이기 위해 독일군의 영국 상륙을 도울 수도 있는 옛 동맹국의 함대를 공격하였다. 폭격 이틀 후, 비시 정부는 영국과의 외교 단절을 선언했다.
2. 영국 폭격을 시작하는 히틀러
1940년 7월 9일, 독일 전체는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프랑스 점령은 장군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신도 나폴레옹과 비견할 위대한 전쟁 지도자라고 자부했다. 이젠 그 누구도 히틀러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1940년 7월, 독일은 저지섬과 건지섬을 점령했다. 영국을 점령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이에 영국 여성들은 전쟁 준비에 나섰다. 여성들도 독일 낙하산 부대로부터 자기 집을 지켜야 했다. 1차 세계대전 베테랑을 포함한 남성들은 지역 방위대에 자원했다. 덩케르크에서 구조된 군대가 재정비하는 사이 자원자들이 동원됐다.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소총과 기관총, 대공포를 공급받았고 전력을 가다듬었다. 처칠의 주요 무기는 영국 공군과 이들이 보유한 뛰어난 항공기였다. 특히 롤스로이스 엔진을 장착한 스핏파이어는 세계 최고의 전투기였다.
전자 공학 분야에서 앞서 있던 영국은 처음으로 국토 방위에 레이더를 사용하였다. 작전실의 레이더는 항공기를 감지하고 파일럿들에게 적의 위치를 알렸다. 독일에 짓밟혀 고향을 떠나온 파일럿들도 합세했다. 폴란드,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등이었다. 여기에 드골 장군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도 함께 했다. 독일 조종사들은 자신들이 무적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지도자 괴링은 정부 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독일 공군은 며칠 안에 영국 공군을 짓밟고 제공권을 확보해 독일의 영국 침공을 이끌 것이라고 약속했다. 독일 공군은 프랑스의 모든 비행장과 설비, 장비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훈련도 잘돼 있었다. 점령지 프랑스의 비행장에서 이륙한 독일 전투기들은 해협의 호위 선단을 공격하고 영국 남부의 항구와 비행장을 폭격했다. 독일군은 전투기 1,000대를 희생하여 영국 전투기 500대를 격추했다.
영국 파일럿들은 모두 전력을 쏟아부으며 버텨냈다. 히틀러는 영국 침략 계획을 고려하기로 했다. 그에겐 첫 실패였다. 그는 야간 폭격에 더 의지하기로 하며 말했다. "모든 도시가 파괴되면 영국은 항복할 것이다."
독일 폭격기는 런던 등 영국의 도시를 공격했다. 매일 폭격이 이어지는 전격 작전이었다. 집마다 방공호를 판 영국 시민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버텨 냈다. 런던 시민들은 지하철역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출근했다. 그들은 자신감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 처칠은 프랑스에 말했다.
"히틀러가 잿더미로 만들겠다던 이곳 런던에서 우리 국민은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답답했다. 그는 처칠을 유대인에 사로잡힌 반미국 주정뱅이라 칭했다. 이후 히틀러는 좌절할 때마다 유대인에게 화풀이했다.
1940년 10월 12일,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은 유대교 최대의 명절인 '속죄의 날'에 게토가 마련될 것이란 소식을 들었다. 3m 높이의 벽이 세워졌고 50만의 유대인이 그 안에 갇혔다. 곧이어 모두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알프스의 한 산장에서 나치 고위층의 자녀에 둘러싸인 채 새해를 축하하던 히틀러는 또 하나의 큰 도박을 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생활권을 동쪽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전에 맺은 스탈린과의 동맹은 소련을 공격하기 쉽도록 꾸민 장치일 뿐이었다. 영국 정벌에 실패한 히틀러는 처칠이 미국을 끌어들이기 전에 재빠르게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이로써 전 세계에 전쟁의 휘말리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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