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론회의 스타, 안창호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묻노니 오늘 대한의 주인 되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빛을 잃은 민족에게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외치며 평생을 도전했고 거듭 실패하며 좌절했던 한 사람. 그리하여 영원한 청년이고자 했던 한 사람. 도산, 당신의 의미는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 어떻게 다가와야 할까.
구한말 개화와 선교의 요람이며 서양 외교의 각축장이자 새로운 문화의 산실이었던 서울 정동. 1894년, 평양에서 상경한 16살 안창호는 정동 거리에서 미국인 선교사 밀러를 만나고, 언더우드 사랑채에서 시작된 고아 학교에 입학했다.
안창호는 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일꾼들을 모아 그들에게 평양의 열정과 힘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선교사 밀러의 보고서
당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만큼 국내 최대의 기독교 도시였다. 서북지방 교인 수는 무려 80%를 차지할 정도로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근대문명 그 자체였다. 기독교 신앙과 서구문화를 접한 안창호는 밀러 학당 인근의 배재학당과도 인연을 맺고, 배재학당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가하며 근대적 토론문화를 접하며 시민사회의 여론정치 원리를 습득하는 계기가 됐다.
협성회의 토론 주제는 하나같이 그 시대의 가장 뜨거웠던 주제들이었다.
1회 - 국문과 한문을 섞어 씀이 가한가
8회 - 노비를 해방함이 가한가
10회 - 회원들이 인민을 위해 가로에 나가 연설함이 가한가
30회 - 정부에서 인재를 뽑는 과거제도에 대하여
32회 - 개항을 많이 함이 나라에 유익한가
토론회의 발전으로 가두연설회(정치연설)를 열었던 협성회 회원 중, 안창호는 연설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이며 현장 연설의 스타로 자리 잡았다.
2.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안창호
1902년, 조국의 운명이 아슬아슬하던 시절 24세 안창호는 서울 제중원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유학을 위해 부인과 대한제국 51번째 여권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인천항을 출발한 지 한 달여 흐른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위치한 엔젤 섬에 도착한 안창호. 천사섬이란 이름과는 달리 동양 이민자들에겐 한이 서린 곳에 도착했다.
100여 년 전, 이주 한인들은 기회의 땅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외치며 낯선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동양 이민자들의 까다로운 입국심사.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 입국 심사에서 건강과 재정 상태 심사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국이 거부됐다. 신문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유학길에 오른 안창호는 결국 샌프란시스코 땅을 밟으며 정착한다. 하지만 안창호 부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날그날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눈물겨운 현실. 안창호는 현지 가정에서 허드렛일하며 학비를 벌고, 부인 이혜련은 가정부로 취직했다.
스쿨 보이 자리를 얻어 일하나이다. 월급은 2원 반씩이오.
-1904.3.31, 안창호가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당시 흑인보다 심한 인종차별을 받은 동양인. 안창호는 이 어려움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함께 해결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고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며 솔선수범을 보인다. 유리창을 닦고 집주인의 이불을 깔아주며 천한 고용살이를 할 때도 어찌나 일을 성실하게 했는지,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쟁탈까지 벌어졌다. 어쨌든 그는 퍽 몹시 성실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성실함이 빛을 발하던 중,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던 안창호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 고려 인삼을 최고로 아는 중국인들의 차이나타운에서 판매 구역과 가격경쟁으로 벌어진 평북 출신 인삼 상인들끼리의 싸움. 교포들이 상투를 붙잡고 싸우는 모습을 자신의 수치로 여긴 안창호는 상투 싸움을 계기로 유학 목표가 신문명에 대한 배움에서 한인 계몽으로 전환되었다. 1903년 9월 13일, 한인들을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깨달은 안창호는 차이나타운 중국인 상점에 모여 한인 친목회를 조직한다.
그들에게 당부한 내용,
깨끗한 옷 입기, 집과 주변 청소하기, 상부상조하기.
동포들에게 이러한 계몽운동을 펼친 그의 나이, 24세.
3. 안 도산 공화국이라 불린 한인 정착촌
1904년 초, LA 근교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안창호. 리버사이드는 오렌지 재배와 유전, 채석장이 번창하여 1930년까지 미국에서 소득 수준이 가장 높았던 곳으로, 그만큼 많은 노동력이 있어야 했다. 이때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던 한인은 300~400명. 이들은 오렌지 따는 일로 생업을 삼았고, 일자리를 찾아 철새처럼 떠도는 한인들의 모습은 풍전등화 위기 속에 처한 조국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오렌지 망태 속에서 시커먼 먼지로 단장한 얼굴에 두 눈만 샛별같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짐작게 했고, 적어도 여든 상자 이상을 따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규정까지. 그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먼 타국에서까지 겪어야 했다.
일자리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한인 노동자들이 집단 정착 생활한 한인 정착촌. 2층짜리 회관 건물과 16동의 단층 주택이 있던 이곳을 미국인들은 안 도산 공화국이라 불렀다. 그만큼 안창호는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안창호는 동포들에게 오렌지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포장하는 방법을 가르쳐 농장주의 신임을 얻고, 노동이 끝나면 밤에 짬을 내 교육에 힘쓰며 한인들의 떠돌이 삶을 변화시켜 나갔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곧 한인사회의 모범이 된다. 한인촌엔 한인 노동 주선소를 설립, 일본계 사람들에게 직업을 알선해줘 어려움을 겪던 한인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한인들의 모든 활동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안창호
고달픈 삶이었지만 한인들의 보금자리였던 리버사이드. 대다수가 노동자였던 한인들은 번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바치고, 동부로 가서 유학하고 싶어 했던 안창호는 학업의 꿈을 포기하고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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