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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윤봉길의 희생과 임시정부 지원 재개

by 휴이_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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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을 위해 희생을 결심한 윤봉길

만주 전쟁과 상하이 사변의 승리에 도취했던 전범국.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릴 일왕의 생일연회와 전승 축하 행사.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그 행사에서 참석자가 준비해야 했었던 것, '도시락'. 소식을 듣고 유독 눈빛을 빛내던 사내가 일왕의 생일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던 전범국 국가, 그리고 그 순간 날아든 폭탄.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전범국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24세 청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청년이 던진 폭탄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었다.

대한독립을 꿈꾸는 농촌 계몽가였던 윤봉길. 19세부터 야학당 운영, 농민 독본 저술, 부흥원 설립, 월진회 조직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지만, 전범국의 방해에 윤봉길은 계몽운동도 민족의 독립 후에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본 윤봉길이 야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불어넣었던 '항일정신'. 가만히 보고 있었을 리 없는 전범국은 야학을 폐쇄하고 윤봉길을 구속, 3주 동안 고된 고문을 자행했다. 풀려난 윤봉길이 결심한 것, '혁명운동을 위한 상하이 망명'. 고향을 떠나며 남긴 한 마디, '장부출가생불환 - 대장부가 집을 한번 떠날 떄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1931년 5월 8일, 윤봉길은 천신만고 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고, 1932년 1월 8일, 노동과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윤봉길이 김구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


뻣뻣하게 말라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강철같은 주먹으로
적을 즉시 부수려 한 것이다

내 귀에 들어온 것은 상하이 임시정부였다

- 윤봉길 의사


김구는 윤봉길과의 대화에서 독립에 대한 의지에 감탄했고, 윤봉길은 일왕 행사를 겨냥한 특공작전을 위임받아 한인 애국단원에 가입했다. 실행을 중요하게 여겼던 한인애국단은 가입선서문을 통해 결의를 다졌고, 윤봉길 또한 가슴에는 선언문, 왼손에 폭탄과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 당당히 맹세했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윤봉길 의사


2. 윤봉길의 의거와 장제스의 감탄

맹세 사흘 뒤, 윤봉길은 그의 목숨과 맹세를 바꾸며 나라와 독립을 위해 약속을 지켰다. 1932년 4월 29일 의거 1시간 전 김구와 만난 윤봉길이 김구에게 담담하게 전한 부탁. "제 시계는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것은 불과 2원짜리 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시계를 바꾸시지요."

"폭탄을 두 개를 줄 테니 한 개로는 적장을, 그리고 또 한 개로는 그대의 목숨을 끊어라!"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나이다 바라옵건대 선생께서는 나라를 위해 몸을 삼가시고 끝까지 분투하소서
군이여, 군과 나는 다시 지하에서 만나세"

2원짜리 시계를 품은 24세 청년은 연회장에서 전범국의 국가가 울려 퍼지자 경축대로 폭탄을 던졌고, 전범국 상하이파견총사령관 외 1인 사망, 총영사 무라이 외 3인 중상을 입히는 쾌거를 거두었다. 연회장에 들어설 때 윤봉길의 품에 있던 위장 폭탄은 총 두 개로, 저격용 물통 폭탄과 저격용 폭탄의 불발 대비용이자 거사 후 자결용 무기로 쓰고자 했던 도시락 폭탄. 결국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사용하지 못한 채, 손에 든 순간 체포되었다.

전범국이 조작한 사진과 함께 전 세계의 이목은 한 청년에게 집중됐다.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 이후 중국 정부로부터 지원이 끊기며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새 방향을 찾기 위해 목숨 바친 '한인애국단' 덕분에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이 다시 시작됐고,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한 의거에 대해 중국 장제스 주석은 이렇게 표현했다. 

"중국의 100만 대군과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1932년 5월 25일, 위대한 한국인은 상해 파견 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1월 18일 일본 오사카의 육군 형무소에 이감됐다.

윤봉길. 그의 의거 이후 체포되어 순국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체포 후 일본까지 끌려갔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의 손에서 떠난 폭탄에 죽은 시라카와 대장은 전범국 육군 중 가장 숭상받는 장군이었다. 전범국은 숭상하는 사람을 죽인 윤봉길에게 치밀한 복수를 계획했고, 계획대로 시라카와 대장이 근무했던 전범국 사단으로 끌고 갔다.

5월 26일,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12번의 수술 뒤에 사망했던 시간 오전 7시 25분, 12월 19일 독립의 뜨거움을 다시 물들인 윤봉길 의사의 이마와 눈을 가린 흰 천이 붉은 피로 물든 시간 오전 7시 27분. '주인이 죽으면 종도 죽어야 한다'는 순사(殉死 - 따라 죽을 순, 죽을 사)의 개념까지 넣었던 전범국의 정교한 복수.

죽도록 전범국이 미웠고, 죽도록 독립을 열망했던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편, 두 아이의 아빠였던 윤봉길. 강보에 싸인 두 아들을 생각하며 이마와 눈이 흰 천으로 쌓였을 때, 한 아버지의 마음에 영원히 쌓였을 그리움과 외로움. 스물다섯, 전범국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자 담담하게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한 바 없다'던 두 아들의 아빠.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 윤봉길 의사


스물다섯, 뼛속까지 사무치는 분노와 열망은 청년을 이토록 어른으로 자라게 했을까.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나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내 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3. 독립에 깃든 윤봉길의 혼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윤봉길은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울린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마감했고, 유해는 전범국에 의해 쓰레기 하차장에 버려져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4분, 지팡이를 짚은 연미복 차림 사내가 항복 문서에 서명해 전범국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오른쪽 다리가 절단돼 다리를 절뚝이던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그의 다리를 빼앗은 윤봉길의 의지. 한국이 빠진 13개 나라가 서명한 전범국의 항복 현장에 윤봉길은 지팡이로써 동행했다.

1946년, 김구는 잊지 않고 애국단원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를 전범국으로부터 송환해 5만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해방 후 첫 국민장을 치렀다. 

불과 100년도 안 된 그때. 한 마디가 금이고, 신뢰고, 맹세고, 목숨이었던 그때. 무엇보다 나라가 중요했던 청년, 덕분에 빈 무덤에 술 한 잔 부을 수 있는 수백만 명의 아들, 딸들. 장부출가생불환. 목숨 바쳐 뜻을 이루고 다시 돌아온 '이 집'에 그가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은 얼마나 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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