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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체르노빌 원전 사고_목숨을 건 수습 작전

by 휴이_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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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처럼 쏟아지는 방사능

폭발 후 1주일, 대 이주가 지속된다(체르노빌을 떠나는 길 - 5월 2일). 발전소에서 7km 지역의 체르노빌시 거주자들이 이주하게 된다. 발전소 반경 30킬로 내의 모든 마을 사람들 또한 이주한다. 130,000명이 이주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위험할 정도로 이미 오염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이르는 300,000헥타르에 이르는 지역이 갑자기 이주하여 세계로부터 격리됐다. 

보이지 않는 적이 며칠 동안 한 세계를 싹 쓸었다. 어쩌면 전쟁보다 더 나빴다. 적을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사선은 어디에나 있다. 우린 그걸 통과하고 영향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끔은 몇 년 후, 그것은 끔찍하다.

한편 방사성 구름은 유럽 위를 계속 떠다녔다. 바바리아와 이탈리아 북부를 떠돌았다. 방사성 세슘137과 방사성 요오드 131이 프랑스 남부와 코르시카에 비처럼 쏟아졌다. 농작물과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됐다. 프랑스 당국이 그 존재를 부정하는 동안 그 구름은 영국에 도달했고 그리스로 퍼졌다. 

체르노빌의 방사선 수치는 계속 올라갔다. 6천t의 모래와 붕산으로 그 구멍을 채워갔다. 그러나 이 거대한 마개 밑에는 하얗고 뜨거운 마그마가 계속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원자로의 바닥에서 195톤의 핵연료가 아직 타면서 모래를 서서히 녹이고 믿을 수 없는 열을 내고 있었다. 그 마개의 표면 위에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멍에서 마개를 뽑았을 때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다른 폭발을 일으킬 수 있어서 매우 우려했다. 그건 실로 끔찍한 비극이었다. 재앙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소방관들이 퍼부은 물이 밑에 고여있었고, 그 물이 마그마와 만나면 2차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첫 번째 폭발보다 더 주변을 폐허로 만들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행동에 돌입했다. 두 번째 폭발이 생긴다면 유럽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었다. 2차 폭발은 끔찍한 충격파와 엄청난 방사능을 일으켜 수 시간 안에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가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 비상조치 선언

모스크바에선 두 가지 비상조치를 선언했다. 첫째, 소방관 부대를 보내 원자로 아래의 물을 빼내도록 한다. 그들은 국가 영웅으로 선포되지만, 남은 삶을 방사능증으로 고통받으며 살아야 한다. 둘째, 틈을 좀 더 효과적으로 막고 완전히 온도를 하강시킨다. 이틀 동안 2400톤의 납을 원자로로 떨어뜨리게 된다. 납을 안으로 떨어뜨리기 시작했을 때 온도가 즉각 내려갔다. 납은 녹으며 구멍을 밀봉했고, 방사선이 적게 나왔다. 그러나 이 납들의 일부는 불길에 녹으면서 대기 중으로 기화했다. 20년 후, 그 자취를 체르노빌의 병든 아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것은 매우 비난받는 일이지만 그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고 더 나은 해결책은 없었다. 그것은 해야 했으며 영웅적 행위였다.

이 작전 동안 600명의 조종사가 방사선에 치명적으로 오염됐다. 그들은 모두 죽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단지 며칠을 벌게 했을 뿐이었다. 비록 덮어버렸지만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그들은 더 접근해서 균열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2차 폭발의 위협은 아직 다가오고 있었고, 그 임시변통 조치는 계속되었다. 발전소 청사진이 공개됐는데, 두꺼운 시멘트벽에 굴을 뚫고 케이블과 파이프로 활성영역에 접근토록 했다. 기술자 대표들은 미로에 뛰어들었다. 터널 부분들이 폭발로 무너졌다. 그들은 4호기 원자로의 외부 벽을 뚫어 방사선 측정기와 온도계를 찔러넣고 카메라를 뒤따르게 했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방사선 수치는 천문학적이었고 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얗고 뜨거운 마그마가 시멘트에 균열을 가게 했고 물웅덩이로 새어 나오게 했다. 5~10%의 폭발위험이 있었다. 원자로 아래에 마그마가 빠지지 않도록 무언가로 막아야 했다. 아무것도 더 깊이 새어드는 마그마를 멈출 수 없었다. 모래로 뒤덮인 토양으로, 그리고 원자로 아래에 거대하게 이어지는 대수층이 놓여 있고 그것이 국가 전체에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3. 광부를 이용한 새로운 작전

새로운 작전이 고려됐다. 1986년 5월 12일, 폭발 후 17일 체르노빌에서 1000km 떨어진 툴라 광부들을 데려갔다. 

5월 13일, 광부들의 임무는 유일하게 가능한 경로인 지하로 원자로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150미터 터널을 파고, 3호기에서 4호기로 30미터 길이의 터널과 30미터 길이에 30미터 공간을 하나 파고 원자로를 냉각시킬 냉각장치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방사선 피폭을 제한하기 위해 타고 있는 원자로 아래에 닿기 전까지 12미터 밑으로 내려가서 팠다. 2m 높이에 30m 넓이였고 액체질소로 된 복잡한 냉각장치를 설치하려고 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온 10.000명의 광부가 터널로 내려보내졌다. 환기장치가 없고, 온도는 50도에 육박했으며 방사선은 시간당 최고 1뢴트겐이었다. 그들은 어떤 보호장비도 없이 일했다. 마스크를 쓰면 습기가 차 호흡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스크 없이 일했고, 뚜껑 열린 물을 마셨으며 산소부족으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정말 빨리 일해야 했다. 30명의 병력이 3시간마다 교체, 최소 3달이 걸리는 작업을 한 달 하고 4일 만에 끝냈다. 원자로 바로 아래는 방사선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감에 따라 더욱 빠르게 달려야 했다. 단 한 명의 광부도 노출을 피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들이 직면한 진짜 위험을 알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들은 했다. 그들 혹은 다른 누군가가 했기 때문에, 그들은 해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 그들은 그 일을 해야 했을까? 라고 판단하기엔 너무 늦었다. 광부들은 그들의 임무를 달성했지만 결국 냉각 장치는 그 원자로 밑에 결코 설치하지 못했다. 결국 지하공간은 구조물을 굳히기 위해 시멘트로 채워졌다. 공식적으로 광부들은 30에서 60뢴트겐을 받았으나, 생존자들은 그들이 그 양의 5배를 더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광부들의 1/4은 40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2,500명이 생명을 잃었는데 어떠한 공식적인 통계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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