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현대사

체르노빌 원전 사고_완료되지 못한 수습

by 휴이_ 2022. 11. 20.
반응형

 

1. 서방과 협력을 원하는 소련

광부들이 원자로 아래를 파고 있을 때 한스블릭은 소련당국과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IAEA를 대신해서 말씀드리면 비극적 사고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생명의 손실과 발생한 그 피해. 사고 후 분석을 위해 빈으로 가기로 소련 당국과 합의했다. 전 세계에서 온 500명의 기자 앞에서 국제회의가 빈에서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곳에서 소련은 재앙에 대한 그들의 모든 자료를 공유하기로 했다. 

소련 정부는 서방과 협력하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개방 시대로의 역사적인 변화. 쓰라리게 필요했던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승리. 체르노빌에서 불은 이제 억제됐으나 수많은 고준위 방사성 파편들이 떨어져 방사성 원소들을 노출했다. 극도로 긴급하게 부서진 구조를 덮고 그 지역을 정화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선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재앙 후 18일,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소련 사람들에게 연설했다. 형식적, 관료적 절차 없이 전 국가가 동원됐다. 이후 비용에 대해 우려했다. 필요한 무엇이든 했다. 1년 안에 10만명의 군인과 장교들이 체르노빌을 통과했다. 그들은 모두 예비군이었다. 그들은 소환됐고 최전방으로 보내졌다. 군 요원들과 시민들, 장교들, 일반병사들 모두는 체르노빌 전투를 위한 청산인(liquidators)이다.

 

2. 수습에 희생된 군인과 민간인

그들의 임무 : 대청소, 방사능 제거하기. 첫째 날은 마스크를 항상 쓰고 다니며 걱정했다. 그다음부터는 그것에 대해 잊었다. 빨리 익숙해질 것이며 편안해졌고, 농담도 했다. 100.000명의 병력이 400,000명의 시민과 같이 노동자 엔지니어 간호사 의사 과학자들 그들은 소련연방 각지에서 체르노빌을 거쳐 갔다. 소련은 최후의 중대한 전투를 계속했다. 500,000명의 사람. 체르노빌의 병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오염되었다. 청산자들은 어디든 덮고 있는 방사성 낙진 막을 집마다 제거했다. 특별한 사냥만이 결성됐고, 그들은 소총을 들고 전원과 숲을 순찰하며 고양이와 개를 죽였다. 모든 동물을 사살해야 했다. 남은 집들에 있는 사람들을 이동시키고 집과 건물들을 철거시켰다. 사람들이 방사성 낙진들로 덮였다.

1986년 7월, 4호기 공업지역. 발전소 둘레로 거대한 작전이 시작됐다. 30만 세제곱미터의 오염된 흙은 커다란 구덩이에 불도저로 밀어 넣었고 시멘트로 덮었다. 폭발 8주 후, 청산인들은 문제의 핵심과 씨름했다. 오랫동안 유독 폐기물들을 중화시키고 더 이상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꺼진 원자로 전체를 격리해야 했다. 170미터의 길이와 66미터의 높이. 한 번에 몇분 혹은 몇 초만 일할 수 있는 곳에 엄청난 건축물을 어떻게 지을까.

1986년 8월, 첫 폭발 후 12주가 더 지났다. 죽음의 오염을 멈추기 위한 마지막 공격이 시작됐다. 이 지역의 방사선은 매우 높아 원격조정 기계가 보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장비들을 작업 위치로 가져가야 했다. 작업자들은 방사선을 치사량으로 받지 않을 단 몇분만 머무를 수 있다. 매초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런 극단적인 조건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10만 세제곱미터의 시멘트가 구조물을 짓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작업을 방해하는 새로운 문제가 발견됐다. 발전소 지붕이 매우 심하게 오염된 흑연 조각들로 덮여있었다. 이를 제거하다가 기계들은 고장이 나버렸다. 그중 하나는 터졌다. 지붕 위의 로봇들은 쓸 수 없었다. 사람들이 투입됐다. 러시아 군인들. 

1986년 9월 17일, 3호기 지붕 아래 젊은 예비군 부대는 처음으로 3번째 원자로의 지붕 위로 가도록 준비했다. 그들은 20세~30세 사이였으며 체르노빌의 가장 위험한 죽음의 전투에 소집된 예비군들이었다. 어떤 인간도 이런 강한 방사선 지역에서 일한 적 없다. 장비 착용만 30kg. 가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 했다. 

지옥의 2주 반. 지붕의 잔해들을 빨리 삽으로 퍼서 지붕 아래로 떨어뜨리는 작업이었다. 한 팀당 45초. 그들은 개미 같았고 작업을 끝내면 곧바로 교대했다. 모두가 그 일을 했고, 그렇게 그들은 방사선과 싸울 수 있었다. 10일 동안 매 10분씩 지붕에 올라갔다. 군조직에 의하면 3500명이 참여했고 그들은 주먹을 쥘 수 없을 정도로 팔에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피해보다 훨씬 적은 양의 수치의 방사선을 기록지에 적었다. 그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붕 위의 방사선 수치는 35%만 감소했다. 지붕 위의 방사능은 시간당 10,000~12,000뢴트겐.

 

3. 상처만 남은 사고

폭발 6개월 후, 1986년 10월 말 그 지역은 정화됐고 석관 작업은 완료됐다.

50만 명의 군인과 시민들이 작전에 참여했다. 마침내 그들은 지붕에 국기를 꽂았고 그것은 방사능에 대한 승리를 대변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그들은 핵발전소의 건설을 멈추었다. 쓰라린 승리. 20조원 정도를 수습 비용으로 썼다.  

1986년 11월 22일, 첫눈이 체르노빌 위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청산인들은 집으로 갔다. 체르노빌의 첫 전투는 결국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오랫동안 20년 후에도 끝나지 않을 전쟁의 시작을 나타냈다. 

20년 후, 프리피야트는 여전히 유령마을이다. 10만 명의 체르노빌 전투 베테랑으로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들은 몸에 흡수된 방사선으로 아직 고통받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병원에 빈번하게 다니고 있다. 이들은 모두 희생자로, 의사들은 체르노빌 증후군이라 불렀다. 청산인들이 집에 돌아갔을 때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많은 생존자가 장애를 입고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당국은 그들의 복지자금을 삭감해가며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 

군에 따르면 500,000명의 체르노빌 청산인 중 2만 명은 이미 죽었고 200,000만 명은 공식적인 장애자가 됐다. 얼마나 살아야 할지, 무슨 질병으로 죽게 될지 모른다. 자녀를 가지더라도 자녀에게 무슨 영향이 갈지 모른다. 이 세계에서 그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20년 동안 체르노빌의 공식 사망자는 59명. 재앙 결과로 59명만을 공식적으로 보고 있다. 그 지역 130,000명의 난민에 대한 단 하나의 조사도 없다. 500,000명의 청산인의 상태에 대한 단 하나의 통계도 없다. 체르노빌 주위와 오염된 지역에 계속 사는 인구에 대한 수치도 없다. 이들이 피폭된 방사선의 실제량을 그들에게 절대 밝히지 않았다.

체르노빌 실제 결과의 조직적 은폐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1991년 소비에트 제국이 사라질 때였다. 중앙 위원회로 올린 600페이지 보고서로 체르노빌 전쟁이 맹렬할 때 쓰였다. 당 지도자가 한 거짓말이 얼마나 큰 것인지가 알려졌다. 

1986년 5월 12일, 명시한 법령 제12호 10,198명 사람이 입원했다. 345명은 방사선 이온화 병변을 보였다. 이때 그들은 국민들에게 모든 것이 좋다, 심각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해왔으나 보고서는 거짓의 규모를 말했다. 당국은 표준을 독단적으로 바꾸어 인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사선량을 5배 늘렸다고 밝혔다. 표준을 올리면 갑자기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낫기 때문이다. 기적의 환자들은 병원에서 퇴원시켜 집으로 보냈다. 그건 범죄였다. 숫자를 다루는 것이 소련만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1986년 늦은 8월, (빈 IAEA 본부) 체르노빌을 평가하는 첫 국제회담이 비공개로 열렸다. 한스 블릭이 주재했고 기자도 관람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 대표들은 레가소프가 이끌었는데 체르노빌 전투 동안 그는 정부 위원을 맡고 있었다. 그는 모두를 충격에 빠뜨릴 매우 자세한 보고서를 가지고 도착했고 3시간 동안 말했다. 그의 보고서는 다가온 10년간 체르노빌에 의한 암으로 약 40,000명의 죽음이 예상된다고 결론지었다. 서방 세계는 이 추정치를 받아들이길 완전히 거절하면서 진실한 동-서 협약의 자극이 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