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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체르노빌 원전 사고_사고 후 1주일

by 휴이_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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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늦게 시작된 수습

폭발 30시간 후, 4월 27일. 첫 보안 조치가 실시되었다. 1000대가 넘는 버스들이 도착했다. 오후 2시, 도시에 있던 군인들이 완전히 대피해야 한다고 알렸다. 어떠한 패닉도 피하기 위해 당국은 상황의 심각성을 감췄다. 소지품을 싸서 그들 집 앞에 모이도록 했다. 단 한 벌의 따뜻한 옷도 가져갈 수 없었다. (모두 오염되어 가져가면 안 됨). 사람들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했다. 그들의 삶을 모두 두고 떠났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믿지 않았으나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4월 27일 17시, 43000명의 사람을 대피시켰다. 버스가 유럽의 첫 핵 난민들을 수송했다. 그들은 많은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어 혈액 구성이 바뀔 수 있고, 치명적인 암이 생길 수 있다. 유령도시에 남은 유일한 사람들은 군인들과 과학 대표들로 프리피야트 호텔을 본부로 삼았다. 위험을 모르는 것처럼 그들은 호텔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그들이 죽음을 초래할 일을 한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그 상황을 과소평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리의 오래된 기준은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5월이나 6월까지 원자로를 재사용할 거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동안 방사성 입자로 가득한 구름이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날려갔다. 4월 26~27일 구름은 러시아 위로 1000km를 떠다녀 벨라루스를 넘어 발트해까지 갔다. 28일, 스웨덴까지 닿아 그들의 핵 발전소 근처에서 방사선 증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곧 TV 뉴스에서 주민들에게 경고 방송을 했다. 체르노빌에서 온 방사선 먼지가 스톡홀름에 비처럼 쏟아졌다. 스웨덴은 전투기 중대를 보내 구름 속의 수치를 읽게 했다. 방사선 수치는 어딘가에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걸 보여줬다. 

 

재앙 60시간 뒤, 소련 연방 밖으로는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다. 스웨덴은 이상징후를 감지하고 구소련에 경고했다. 사고 3일 후, 고르바초프가 자료를 모으고 있을 때 미국과 유럽은 스파이 위성을 소련연방으로 돌려 우크라이나 발전소의 잔해들을 찾았다. 딱 벌어진 구멍에서 퍼져나오는 연기가 열정 화상을 또렷하게 보여줬다.

28일 월요일 밤, 소련 원자력에너지 위원회인 책임자는 사고에 대해 말했고, 러시아인들이 세계에 사실을 발표했다. 그때부터 모든 사실이 보고되었다. 

재앙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데만 48시간이 넘게 걸렸다. 프리피야트 43000명의 거주자가 오염에 노출되는 이틀, 위기는 계속 커 갔다. 파괴된 원자로 바닥에서 1200톤의 하얀 뜨거운 마그마가 3000도 넘게 계속 타며 방사성 기체와 먼지를 대기 중으로 계속 보내고 있었다. 유럽 전체는 바람에 좌우되었다. 

 

2. 지옥의 체르노빌

4월 28일, 재앙의 3일째에 80대의 헬리콥터는 불과 싸워 화재를 진압도록 모스크바에서 보내졌다. 총책임자는 도착 후 꺼진 원자로 200미터 위를 날았다. 화재로 인해 그 높이에서의 온도가 120~180도 사이였다. 방사능 계측기는 500뢴트겐까지만 읽을 수 있었는데, 바늘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계측기 한계를 완전히 넘었다. 원자로로부터 뿜어지는 뜨거운 방사성 공기의 독한 흐름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떤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다른 작업을 할 수 있게 불을 끄고 원자로를 봉쇄해야 했다. 또 가까이 가서 방사성 낙진이 퍼지는 걸 중단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람에 날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맨손으로 불 속을 향해 80kg짜리 자루를 던졌다. 그들은 불길이 잡히길 바라며 수 톤의 모래와 붕산으로 원자로를 채워 방사선을 중화시키려 했다. 첫째 날 100번 출격. 다음날 300번. 원로 바로 위 방사선 수치는 3500뢴트겐을 넘었는데 이는 치사량의 거의 9배가 된다. 조종사 일부는 하루에 33번 비행하여 접근했다. 갔을 때마다 5~6뢴트겐씩 피폭되었다. 머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 많이 피폭됐다. 몇 자루를 던져 넣은 후 열기 때문에 땀으로 흠뻑 젖었고 그들은 토하기 시작했다. 그 증세가 시작되고 나서 방사선 희생자들은 모스크바 제6호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것은 국가의 유일한 시설로 방사선에 대량 피폭 시 나타나는 급성 방사선병과 질환을 전문으로 다뤘다.

방사능증의 처음 증세, 구토 메스꺼움 설사. 이후 잠재기가 뒤따른다. 나중에서야 죽음을 초래하는 더 많은 증세가 나타난다. 골수 악화와 피부가 먹혀들어 가서 뼈까지 끔찍하게 타들어 간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들은 회복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들은 잠복기 상태였고 몸이 괜찮다고 느꼈다. 그러나 의사들은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중 27명은 매우 빨리 죽었다. 그들 모두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생명을 위협하는 화상에 시달렸다. 

15년 동안, 단지 첫 희생자만 당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1986년 5월 1일, 발전소에서 동쪽 30km에 있는 숲은 누렇게 말라갔는데 폭발에 의한 방사성 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재앙 지역은 이미 훨씬 더 멀리 이어졌다. 그 폭발 때문에 구름에 실린 방사성 입자들이 비와 함께 내렸다. 오염은 표범 무늬 형태로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러시아에 영향을 줬다. 5월 1일에는 바람이 바뀌어 키예프 지역 또한 오염되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여전히 암흑 속에 있었다. 신문 3면의 아주 작은 칸에 사고를 경시하고 위험은 지나갔다고 언급할 뿐이었다. 지붕은 동굴 속에 있으며 거기에서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국가가 그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체르노빌 재앙의 두 번째 양상이었다. 

사고 후 6일째, 정상보다 수천 배 높은 방사선 수치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5월 축제에 참여토록 사람들을 부추겼는데, 심각하게 오염된 걸 알면서도 그런 지역들에서조차 축제를 진행했고 현재 1986년 5월 축제의 모든 자료화면은 우크라이나 국립 기록 보관소에서 모두 사라졌다. 축제 동안 얼마나 많이 오염됐을까? 단 하나의 통계 조사도 발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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