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현대사

1차 세계대전_이탈리아를 무너뜨리는 독일

by 휴이_ 2022. 11. 19.
반응형

1. 영국의 참전

1917년 7월 1일, 영국의 왕 조지 5세가 대륙에 도착했다. 그의 400번째 전선 방문이었다. 북해에 펼쳐진 모래언덕에서 벨기에군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벨기에 군주 알베르트 1세는 자신의 나라에 남아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 알베르트 1세는 조지 5세와 육촌 사이였고, 두 사람 모두 독일 혈통으로 작센 코부르크  고타 왕가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조지 5세는 이름을 바꿨고, 이후 영국 왕실은 윈저 왕가로 불렸다.

조지 5세는 독일 잠수함 때문에 영국 국민들이 굶주리고 많은 사람이 죽는 것에 크게 걱정했다. 그는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의 해결책은 독일의 벨기에 점령지 오스텐트와 브루제의 독일 잠수함 기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영국군은 벨기에에서의 공격을 준비했다. 이 작전의 사령관은 '솜강의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헤이그 장군이었다.

1917년 4월, 전략상 거점 프랑스 비미 산등성이에서의 공격으로 10,600명의 캐나다 병사들이 불구가 되거나 죽었다. 피해가 너무나 막대해서 교체할 자원 병력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영제국 전역에 징병제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은 캐나다에서 폭동의 불씨가 됐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전략적으로 어려운 이곳에서 새로운 공세를 펼치는 것을 반대했다. 플랑드르 지방은 독일군의 방어력이 그 어떤 전선보다 강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신중한 로이드 조지는 영국 병사 20만 명이 이미 희생됐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미국군이 움직이길 기다리려 했지만 군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편협하고 융통성 없는 군 지도자들은 다른 전략을 구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예정대로 공격 작전을 상세히 계획했다. 목표는 벨기에 파스샹달 마을 부근에 있는 독일 전선. 그들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1917년 7월 31일, 공격이 또 시작됐다. 지난 3년간 계속해서 되풀이된 시나리오의 반복이었다. 이번에 영국 포병대는 솜강 전투보다 4배 더 많은 400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15일 동안 지속된 포격. 그 후 지난해 솜강에서 그랬듯이 탱크들이 투입된다. 하지만 탱크 수는 훨씬 더 많은 100대가 투입됐다.

탱크들은 가시철조망들을 넘어뜨리며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려는 두 영국군의 길을 터줬다. 독일군의 집중포화에도 연합군은 거침없이 진군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던 연합군은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엄청난 폭우로 인해 폭격으로 파괴된 땅이 진흙탕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들은 익사했다. 병사들은 시체들을 타고 넘었고, 시쳇더미에서 살아있는 아군을 끄집어냈다. 진흙탕에 박혀버린 탱크들은 독일군의 야전포 77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 독일 병사들은 불구가 된 탱크를 해체해 쓸만한 것은 무엇이든 가져갔다. 독일은 연합군의 공세로 탱크를 만들 철강이 바닥나고 있었다.

 

2. 이탈리아를 무너뜨리는 독일

1917년 9월, 군 지도자들은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했다. 몇 주가 지나도 헤이그 장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땅은 여전히 물에 잠겨있어 병사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전화선도 절단된 전쟁터. 이곳에서 소식을 전할 방법은 전령 비둘기뿐이었다. 비둘기들은 헤이그에게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헤이그가 세운 계획에서는 파스샹달 마을이 몇 시간 만에 점령할 수 있는 땅이었지만 결국 이를 점령하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 

캐나다 병사들의 피로 얼룩진 시가전 끝에 연합군은 마침내 이 마을을 점령했다. 점령 후의 파스샹달, 그곳은 재앙 그 자체였다. 이 죽음의 땅에 새 생명은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파스샹달은 역사상 가장 크고 피비린내 나며 가장 쓸모없는 전투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옥 같은 현실. 병사들은 지옥에서 한시라도 빨리 꺼내줄 손길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은 사람들의 욕심과 분노에서 탄생해 그들을 공포에 가두고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하게 열망했다. 

1917년 가을, 세계는 계속 전쟁 중이었다. 미국이 영국,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 편에 섰다. 이탈리아는 트렌토와 트리에스테를 점령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싸우고 있었다. 이탈리아 병사들은 알프스에서 끔찍한 고난과 맞닥뜨렸다. 대부분은 소작농이었던 그들은 카도르나 장군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이탈리아 군대의 위계질서는 가혹했다. 750명의 병사가 본보기로 총살형을 당했다. 암울한 시대에 암울한 기록이었다.

이탈리아 병사들은 매일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그중 하나는 3,000m 높이에 대포를 나르는 일이었다. 알프스에서도 기존의 방어 전술이 똑같이 이어져 가시철조망과 참호가 만들어졌다. 이곳의 병사들은 얼음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탈리아의 공격은 반복됐고, 수적으로 열세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결국 독일에 지원을 요청했다.

1917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한 독일 원군이 도착했다. 이 중에는 훗날 독일 육군 원수가 되는 26살 롬멜 중위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이탈리아 전선에 침투했다. 침투는 대성공이었다. 롬멜은 엄청난 수의 포로를 잡아들였고 이탈리아 전선은 곧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지 5세

조지 프레데릭 어니스트 앨버트로 에드워드 7세(184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와 알렉산드라(1844년 12월 1일 ~ 1925년 11월 20일)의 둘째 아들.


그의 왕비는 테크의 메리였는데 원래 형 앨버트 왕자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앨버트 왕자가 1892년 1월 14일에 28세의 나이에 결혼 직전 독감으로 사망해 조지가 형의 약혼녀 메리를 신부로 맞게 되었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뜻에 따른 결혼이었지만, 둘은 평생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군주로서의 소양이 필요한 교육은 모두 후계자였던 형 앨버트의 몫이었고, 조지는 자기가 왕이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조지는 적성을 찾아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형 앨버트 왕자가 사망해 갑자기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전 유럽의 군주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굳건한 의지와 책임감으로 왕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