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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차 세계대전_시작된 대서양 전투

by 휴이_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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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멸 속으로 빠져드는 독일

1917년, 전쟁의 소용돌이에 신음하던 유럽. 독일도 다른 유럽의 나라들처럼 여자들이 남자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남자들은 죽었거나 전선에 있거나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한 병사는 아주 귀한 음식을 집에 선물하기도 했다. 바로, 바나나였다. 독일은 영국 해군의 봉쇄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었다. 독일은 서서히 파멸 속으로 빠져들었다.

독일의 식량 배급은 하루에 1,000칼로리도 되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 민간이 40만 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하지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언제나 풍성하게 식사를 즐겼다. 100만 독일 병사들이 수많은 전선에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그 수행원들은 민간인의 삶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참호에선 3년의 전쟁을 겪은 병사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1917년, 독일군은 서쪽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북부 지역과 벨기에 점령지를 지키고자 했다. 동쪽에서 독일은 러시아 제국 영토의 12만 제곱 km을 점령했다.

 

2. 러시아의 혁명

1917년 2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황제 대신 황후가 통치하고 있는데 러시아 국민들은 황후가 독일의 첩자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미워했다.

광기와 종교적 열의가 들끓었던 러시아. 황제는 참담한 사망자 수를 확인하게 된다. 키예프에 있는 인공 수족 공장은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불구가 된 정권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은 러시아의 원동력이었던 부와 활기를 모두 절단해 버렸다. 곧 군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많은 병사가 주둔지를 이탈해 아내들에게 달려갔다.

그녀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편의 희생으로 치러지고 있는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학생들과 근로자들도 합류한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러시아의 수도에서 민간인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수비대가 반란군과 한편이 된다. 현수막에는 "국민과 군대의 연합. 평화. 공화국이여 영원하여라, 낡은 정권을 타도하라"라고 쓰여 있었다.

1917년 3월 15일, 마침내 니콜라이 2세는 퇴위했다.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장악한 중도파 임시정부는 축출된 황제에게 망명을 허락하는 것을 고려했다. 가택 연금된 니콜라이 2세는 친애하는 사촌, 영국의 왕 조지 5세에게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회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자신의 인기나 왕좌를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혁명이 전염될까 두려워했다. 결국 조지 5세는 자신과 쏙 빼닮은 사촌 니콜라이 2세의 요청을 거부했다. 

위대한 제국들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러시아의 전쟁을 끝냈을까. 그렇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영국,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역시 애국심의 열기에 불을 붙였다. 케렌스키는 군사 공격을 계획했고, 승전을 통해 러시아 국민들을 민주 공화정 중심으로 결집하고자 했다. 

독일의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휘청거리고 있었다. 해상봉쇄로 국민들은 더욱 굶주렸다. 지난해 말, 빈에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반세기가 넘는 통치 끝에 6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1914년 사라예보 암살사건 후 자신이 불러일으킨 재앙을 모두 지켜볼 만큼 오랜 삶을 살았다. 장군들은 황제에게 전쟁을 촉구했고 이제 그들의 군대 절반이 사라졌다.

무엇이 이 학살을 끝낼 수 있을까.

제국의 새로운 황제, 29세 카를 1세는 패전 후 자신의 제국이 약해져 있으며 체코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선에서 복무했던 카를은 전쟁을 증오했고 끔찍한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헛된 공격 전술에 반대했다. 그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평화였다.

 

3. 평화를 위한 제안

1917년 3월, 그는 파리로 비밀평화제안서를 보내 프랑스와 영국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카를이 이탈리아의 권리 허가를 거부하며 협상은 결렬됐다. 독일 황제 역시 적대 행위를 끝내자는 제안을 한다. 그는 교전국들이 현재 상태를 받아들여 독일이 점령한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 그리고 알자스, 로렌 지역을 소유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의 평화 제안을 거절한 프랑스. 그 결과 육군 원수 힌덴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독일의 진짜 영웅 루덴도르프 장군이 군을 통솔하게 된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베를린에서 러시아처럼 파업과 시위가 일어날까 걱정했다.

군수공장들은 지난 3년간 지칠 대로 지친 여성 근로자들에 의해 돌아갔고 병사들은 전선에 나설 수 없었다. 사회주의자들과 정부 사이의 신성한 동맹으로 전쟁을 가능케 했던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독일의 주요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당을 버리고 스파르타쿠스 혁명을 일으켜 전쟁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루덴도르프가 생각한 해결책은 단 하나, 그가 '무제한 잠수함전'이라고 부르는 전투에서 독일이 최대한 빨리 승리해 영국을 무릎 꿇게 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이었다. 독일 잠수함 100대, 중립국 선발을 포함한 모든 상선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국제해상법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독일 총리 베트만-홀베크는 미국의 반응을 두려워했다. 그는 독일이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독일의 잠수함들은 영국에 물자를 공급하는 모든 선박에 어뢰를 발사하라는 명령받았다. 그 선박이 설령 미국의 선박이더라도. 독일 해군의 제독들은 독일 잠수함들이 한 달에 50만 대의 배를 침몰시킨다면 영국이 6개월 안에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곧, 첫 번째 대서양 전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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