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맹국들의 참전
아시아에서는 영국과의 동맹조약을 지키기 위해 일본이 독일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본군은 이것을 중국 내에 독일인 집단 거주지인 칭다오 항구를 점령할 기회로 삼는다. 이곳엔 지금까지 유명한 맥주를 생산하는 독일 맥주 공장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경제와 군사력이 강해진 일본은 7일 연속으로 독일 방위군을 폭격했고 결국 독일군을 무너뜨렸다. 반면 유럽에서는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분쟁은 중동까지 확산했다.
1914년 11월 23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인 예루살렘에서 독일군과 손잡은 무에진들은 성전을 선포하고 프랑스, 영국, 러시아군과 싸울 이슬람 전투부대를 결집했다. 오스만제국은 곧 전략적 거점을 차지한다.
현재 터키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와 흑해 사이의 뱃길을 장악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영국군의 핵심이자 서부전선의 물자를 수송하는 주요 항로인 수에즈 운하를 위협했다. 오스만 제국의 국왕 메흐메디 5세.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환영했다.
빌헬름 2세는 터키의 동맹을 사려고 했던 영국의 외교 책략을 걱정했지만 독일이 영구보다 비싼 값을 불렀다. 메흐메디 5세는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국가의 실권은 민족주의단체인 청년투르크당이 쥐고 있었다. 청년투르크당의 33세 엔베르 파샤가 터키의 독재자였다.
독일에서 교육받은 엔베르 파샤는 독일군이 훈련하고 양성한 10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독일군은 엔베르 파샤의 군대가 러시아와의 전쟁에 힘이 돼주길 기대했다. 엔베르 파샤는 터키의 숙적인 러시아를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는 국경지대, 카프카스산맥에서 공격하기로 결의한다. 터키 전사들은 이미 러시아군과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산길로 나아가며 여러 산에 부대를 배치해 적군을 정상으로 유인했다.
지난번 터키와의 전쟁 당시 러시아 장군은 말했다. "카프카스산맥은 요새다. 정신 나간 사람만이 그 산에 오르려 할 것이다"
엔베르 파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그리고 1914년 12월 22일, 한겨울. 마침내 그는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공격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패배한 터키군 7만 명의 병사들이 추위로 죽거나 후퇴 중 몰살당했다.
집권당인 청년투르크당과 엔베르 파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르메니아인을 노렸다. 지식인과 공동체 지도자들은 첫 번째 표적이 됐다. 이어 강간과 구타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첫 번째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수백 km 떨어진 시리아 사막의 야영지로 향했다. 탈진, 구타, 굶주림에 쓰러진 그들은 약 100만 명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 어두운 역사의 한조각은 수십 년 동안 아르메니아 지역과 터키지역을 갈라놓고 세계를 갈라놓았다.
2. 동맹국들의 활약
1915년 3월 18일, 영국·프랑스 공동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침공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불가리아가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편에서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포와 수중 지뢰를 보유한 터키군은 전함 세 척을 격침했다. 이 패배 이후 당시 해군성 장관이자 작전 지휘자인 윈스턴 처칠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 재앙의 책임은 해군 제독들과 장군들에게 있었다. 계속해서 터키군을 과소평가한 이들은 갈리폴리에 상륙해 적군의 포진지를 장악하고자 했다.
1915년 4월 25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연합군이 영국, 프랑스 파견대와 함께 좁은 해변에 상륙했다. 가파른 경사 위에 있는 터키군은 그들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터키군은 훌륭한 무기와 장비, 훌륭한 지휘자들이 있었다. 연합군은 터키군의 공격에 몇 달 동안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었다. 연합군 장군들은 지도도 없었고 물자보급을 위한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이곳에서만 15만 명의 연합군이 사망했다.
그리고 곧 불가리아는 독일군 편으로 전향했다. 갈리폴리에서 연합군은 막대한 재산과 인적 자원을 허비했지만 전략적 가치가 있는 땅을 손바닥만큼도 얻지 못했다. 동프로이센의 승장 힌덴부르크 장군이 드러낸 독일의 힘도 한계에 부딪힌다. 사상자 수가 높아지자 전쟁 반대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1915년 4월, 여전히 중립을 지키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평화를 위한 국제여성 회의는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염원과 달리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분쟁이 또 확산한 것이다.
3. 이탈리아의 참전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가 참전한다. 전쟁 초반엔 중립국이었으나 이탈리아는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된다. 즉각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영토인 토렌트와 트리에스테를 이탈리아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곧 이탈리아는 연합군 편으로 전향한다. 이탈리아를 휩쓴 애국심과 반오스트리아 열기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전쟁 속으로 뛰어드는 이탈리아 청년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고난을 전혀 알지 못했다.
프랑스 전선은 가끔 치명적 공격을 받으며 참호 속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전쟁 초반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교착상태에서 독일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목표는 러시아 지배하에 있는 폴란드 땅, 바르샤바였다. 성공을 확신한 독일의 새로운 총사령관 팔켄하인 장군. 이때 공식적으로 여전히 중립국인 미국에서는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급증했다.
이 현상은 독일 잠수함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어뢰로 격침한 1915년 5월 7일 이후부터 일어났다. 독일군은 이 공격을 루시타니아호가 탄약을 수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당한 공격이라 주장했다. 폴란드를 공격한 독일군은 총사령관의 예상처럼 승리했고, 독일군의 수중엔 러시아 포로 수천 명이 들어왔다.
1915년 8월 4일, 독일군은 당당하게 바르샤바를 행진했다. 영국인들은 대영제국의 심장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때 새로운 전투가 탄생한다. 또 한 번 세상을 악몽으로 밀어 넣은 전투. 파괴의 전쟁이자 말살의 전쟁, '상업전'. 군의 목표는 이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최대한 빠르게 죽이는 것이었다.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무시무시한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온갖 종류의 수류탄과 포탄, 여러 가지 독가스. 과학연구로 이룬 '뿌듯한' 업적들.
인류는 점점 지옥의 문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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