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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차 세계대전_전쟁에 뛰어든 미국

by 휴이_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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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윌슨의 결심

잠수함 사령관들은 독일의 새로운 영웅이 됐다. 그중 프랑스 망명자의 후손이자 프로이센 출신의 영웅, 로타르 폰 아르놀트 델 라 페리에는 세계의 모든 선박이 등록된 등록부를 들고 자신이 침몰시킨 배들을 지워나갔다.

로타르 폰 아르놀트 델 라 페리에는 배 200척을 침몰시켰다. 무게로만 50만 톤이 넘는 기록이었다. 그는 비무장 선박을 파괴하기보다 진짜 해상 전투에서 적군과 싸우고 싶어 했다. 상선의 선원들은 수면 아래에 숨어있는 독일 잠수함과 싸울 재간이 없었다.

배들은 계속해서 침몰했다.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독일 총리의 가장 큰 공포는 현실이 됐다.

1917년 3월, 미국 상선 세 척이 대서양에서 격침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참전할 구실이 생긴 미국.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즉각 움직였다.

하지만 윌슨이 프랑스와 영국을 돕고자 하는 것은 원칙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나라는 미국에 20억 달러를 빚지고 있었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미국은 이 빚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중립으로 이득을 보았다. 오랜 경제위기 후에 미국의 제조업은 유럽으로 통조림, 면, 군수산업 폭발물을 수출하며 크게 번창했다. 미국은 부강해졌고 윌슨은 전쟁으로 형성된 세계 정국에서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길 원했다. 하지만 1916년 재선 유세 당시 윌슨은 독일 혈통의 유권자들에게 미국이 중립을 지킬 것임을 약속했다.

윌슨은 여론을 참전 지지로 돌릴 수 있을까.

어뢰 공격에 이어 윌슨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다른 위기가 닥쳤다. 지난해 미국의 기병대는 국경지대 파괴행위로 멕시코 분쟁에 개입했다. 윌슨은 멕시코가 독일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미국에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영국 첩보부는 독일의 전보를 가로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텍사스주와 애리조나주를 멕시코에 넘기겠다는 약속을 확인했다. 이 전보는 윌슨에게 미국의 고립주의를 끝내고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표결을 의회에 요구할 구실을 제공했다.

 

2. 참전을 결정한 미국

1917년 4월 6일, 마침내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다. 미국은 영국 편에 서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세르비아, 그리스, 포르투갈, 그리고 일본과 동맹이 됐다. 시작은 분쟁이었지만 이제는 세계대전이었다.

1917년 4월 24일, 프랑스의 조프르 사령관이 미국을 방문해 동맹 선언을 홍보했다. 그의 방문은 프랑스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정을 더욱 일깨웠다.

프랑스 국기와 성조기가 함께 펄럭였고 "훈족에게는 지옥도 사치다"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도 그 뒤를 이었다. 초반에 뜨거운 열기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열정적인 연설, 거대한 행진과 엄청난 군사력을 보여준 미국. 하지만 미국엔 사실상 군대가 없었다.

12만 5천개의 부대가 있던 미국에 병사다운 병사는 1만 5천 명의 해병대뿐이었다. 미국은 자원입대자들이 시급히 필요했다. 미국군은 영국군의 지휘에 따르며 엉클 샘이 그대를 원한다는 모집 포스터를 배포했다. 정부 당국은 100만 명이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6주 후 입대자 수는 겨우 8만 명뿐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들은 불과 50년 전에 끝난 남북전쟁의 고통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은 병역의무 법을 도입했다. 처음엔 신병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서운 훈련 교관 외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부족한 군복, 나무로 된 모형 소총. 대포 역시 모형이었다.

반면 신병들은 길거리 싸움에 능한 경우가 많았다. 유혈사태로 진화한 국가에서 배운 기술이었다. 머지않아 진짜 전투에 투입될 병사들. 하지만 연합군의 배를 독일군이 계속 침몰시킨다면 그들은 유럽으로 갈 수 없었다.

이에 미국은 배를 무장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이동하며 구축함 호위대의 보호를 받았다. 구축함은 속도와 기동성을 위해 건조된 작은 군함으로 잠수함의 잠망경을 찾는 훈련을 받은 선원들이 탑승했다. 폭뢰로 무장한 구축함들. 폭뢰는 물속에 떨어뜨리는 폭약통으로 잠수함을 격침하거나 수면으로 끌어낼 수 있는 폭탄이었다.

특정 깊이에 이르면 터지는 폭뢰. 이는 독일 잠수함에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 호송체계로 독일군의 피해가 늘어났고 영국과 프랑스로 더 많은 물자가 공급됐다.

1917년 봄, 프랑스는 3년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슈멩 데 담이라 불리는 북부 고원지대 크라운 마을 부근에서 프랑스군은 형편없는 공격으로 큰 위기를 자초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어째서 사령부가 여러 차례 자살 공격에서도 깨달은 바가 없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프랑스 최고 사령관이 된 페탱장군. 그는 다른 장군들과 달리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누구?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년 12월 28일 ~ 1924년 2월 3일)은 미국의 28대 대통령 (1913년~1921년)

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저명한 역사가이자 정치학자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며, 개혁적인 민주당 당원이었다.

윌슨은 1910년 뉴저지주 지사로, 1912년 대통령으로서 선출되었다. 그의 첫 대통령 기간엔 언더우드-시먼스 관세법과 연방 무역 위원회와 연방준비제도의 창조를 포함한 주요 입법에서 결과를 가져왔다. 윌슨은 인기 있던 대통령이었다. 그 인기에 힘입어 재임에 성공했다.

1919년 9월 미국인들에게 조약을 파는 데 전국 여행이 있는 동안 윌슨은 뇌졸중을 앓았다. 나머지의 달들은 부분적인 회복으로 이끌었으나 윌슨은 전혀 똑같지 않았다. 최후적으로 타협을 협상하는 데 대통령과 함께 고립주의의 미국 상원은 2번이나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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