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괴된 원자로
1986년 4월 25일 금요일은 우크라이나의 도시 프리피야트의 43,000명의 거주자와 전 세계에 영원히 새겨질 날이었다.
그 시로부터 3km 떨어진, 매일 수천 명의 사람이 일하러 가는 블라디미르 리치 레닌 핵발전소. 그날 저녁 4호기의 176명 직원이 원자로의 자체 연료공급 시스템을 시험하고 있었다.
오전 12시 54분, 테스트를 중지했다.
오전 1시 23분,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실험이 시작됐다. 원자로 중심부에서 연속적인 폭음이 났고, 프리피야트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동안 발전소 밑바닥은 떨리기 시작했다. 1200톤 원자로의 뚜껑이 갑자기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방사성을 띠며 증발한 기체의 초강력 흐름이 우라늄과 흑연을 발전소 주위로 수백미터 넘게 퍼뜨렸다. 떡 벌어진 구멍에서 핵분열로 생긴 방사성 물질이 가득한 불기둥이 1000미터 하늘로 뿜어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심각했던 핵사고가 일어났다.
오전 2시, 체르노빌 원자로엔 원자폭탄 20개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 있었고, 방사능을 함유한 수천 톤의 흑연이 있었다. 원자로가 폭발했다면, 그 많은 방사능이 방출될 게 분명했다. 방사능은 어디든 퍼진다. 바람을 따라. 냄새도 없고 무차별적으로 목숨을 앗아간다.
오전 2시 30분, 원자로가 이미 파괴됐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로를 냉각시키기 위해 물을 공급해야 한다고 믿었던 발전소 직원들은 목숨을 걸고 밸브를 열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심각하지 않은 것이라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현실을 외면했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몸이 쇠약해지고 치료가 불가능하다. 처음엔 어지럽고 구토증세를 보이다 혀가 부풀어 오르고 피부가 떨어져 나감. DNA가 바뀌고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데 더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힌 연구원들은 현실을 부정함.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상상을 초월하면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결론짓게 된다.
그 상황에 처음 도착한 소방대원들은 보호장구도 없이 불과 싸웠다. 그 이상한 형형색색의 불에 수 톤의 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불을 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치사량에 해당하는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그날 저녁 2명이 죽었고, 몇 개월 안에 28명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체르노빌의 첫 희생자였다. 아무도 그런 사고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오전 6시 15분, 사고 발생 5시간 후. 소련의 인력은 사고 수습을 위해 투입됐고 만사가 모두 순조로워 보였다.
2. 거짓 보고로 잃은 목숨
오전 10시, 사고 발생 8시간 30분 후
방사능 수치는 3.6 렌트겐이 아니라 15,000이었다. 발전소 주위의 주민들을 대피시키려 했지만, 상부에 수치를 보고할 수 없었다. 방사능 수치는 정상이라고 보고했고, 이들을 구조하는 구조대원과 연구소 직원들은 하나둘 쓰러져갔다.
이후 7개월 동안 50만 명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적과 백병전을 벌인다. 찬양받지 못한 무자비한 전투에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수천 명의 영웅. 이 사람들은 감사 인사를 받지 못했다. 최악의 사태를 막은 것에 대해.
두 번째 폭발. 히로시마보다 10배 더 강력하며, 유럽의 절반을 휩쓸었을 폭발. 이것을 구소련과 서양이 서로 20년 동안 비밀로 지켜왔다. 기자들이 찍은 것들이 20년 뒤에 보여졌고, 그들 또한 핵 오염에 노출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의 이른 아침엔 하늘로 1000미터 솟은 방사선 기둥에 의해 구름은 이미 오염되어 있었다. 그것을 찍으러 간 사진기자의 모든 장비는 몇 분 후 고장 났다. 사진작가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으며, 밧데리가 나간 걸로 생각했다.
꺼진 로의 중심은 잔해의 14미터 아래에 묻혔고, 핵연료를 감싸는 흑연이 우라늄을 태워 녹이고 있었다. 방사능 낙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핵폭탄을 합한 위력보다 100배나 더 많았다. 폭발 8시간 후 크렘린, 고르바초프는 상황에 대한 불충분한 정보를 받았다.
첫 번째 정보는 '사고'와 '불'로 이뤄져 있었다. 폭발에 대한 언급 없이, 처음에는 폭발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런 거짓 정보의 결과는 특히 치명적이었다. 프리피야트 43000명의 거주자는 평소대로 생활했다. 그들은 3km 떨어진 재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첫 보고에서 얻은 정보는 원자로를 포함한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다는 것이었다. 학술위원에게 질문했을 때, 그는 원자로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대답했다.
그 도시에 루머들이 돌았는데, 당시 저녁 발전소에 화재와 사망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나오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군인들에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레베뉴크 대령은 상황을 통제하는 임무를 맡고 병력을 이끌었다. '입에서 금속성 신맛이 느껴졌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방사성 요오드 맛이었다. 그레베뉴크 대령의 사람들은 최초로 도시에서 방사선을 측정하며 그날을 보냈는데, 정상적인 대기 0.000012뢴트겐의 수치가 나와야 할 프리피야트의 이른 오후엔 평소보다 15000배가 높게 나왔다. 그리고 저녁때는 그 값이 정상치의 600000배(7뢴트겐)까지 상승했다. 그의 부하들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피해 없이 사람은 1년에 2뢴트겐 정도를 흡수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400뢴트겐 넘게 피폭되면 인체는 치명적으로 오염된다. 첫날에만 거주자들은 무해한 양의 50배를 넘게 흡수했다. 그런 속도라면 4일 안에 치사량에 이르게 된다.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 위해 대령은 발전소 아래에 사람을 보내 처음으로 측정하게 했다. 2080뢴트겐. 이런 천문학적인 수치에서 15분이면 인간에게 치사량이 된다. 핵 기관에 그 수치는 충격을 주었다. 그런 방사선 수치를 전엔 본 적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서둘러 정부 위원회를 국가 최고 핵에너지 전문가들로 만들었다. 국제적 명성의 핵 전문가 학술위원 레가소프가 이끌었다. 그는 과학 대표단을 끌고 바로 체르노빌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 며칠 동안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었다.
폭발 후 20시간 뒤, 방사선 수치는 계속 올라갔다. 그때까지 창문과 문들은 밀봉됐고, 요오드 정제를 삼키며 방사선 영향에 대응했다. 그런 지시가 아직 없었으나. 도시의 긴장감이 증가하지만 어떤 예방조치도 아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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