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의 참전
어뢰 공격에 이어 윌슨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다른 위기가 닥쳤다. 지난해 미국의 기병대는 국경지대 파괴행위로 멕시코 분쟁에 개입했다.
윌슨은 멕시코가 독일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미국에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영국 첩보부는 독일의 전보를 가로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텍사스주와 애리조나주를 멕시코에 넘기겠다는 약속을 확인했다. 이 전보는 윌슨에게 미국의 고립주의를 끝내고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표결을 의회에 요구할 구실을 제공했다.
1917년 4월 6일, 마침내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다.
미국은 영국 편에 서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세르비아, 그리스, 포르투갈, 그리고 일본과 동맹이 됐다. 시작은 분쟁이었지만 이제는 세계대전이었다.
1917년 4월 24일, 프랑스의 조프르 사령관이 미국을 방문해 동맹 선언을 홍보했다. 그의 방문은 프랑스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정을 더욱 일깨웠다. 프랑스 국기와 성조기가 함께 펄럭였고 "훈족에게는 지옥도 사치다"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도 그 뒤를 이었다.
초반에 뜨거운 열기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열정적인 연설, 거대한 행진과 엄청난 군사력을 보여준 미국. 하지만 미국엔 사실상 군대가 없었다.
12만 5천 개의 부대가 있던 미국에 병사다운 병사는 1만 5천 명의 해병대뿐이었다. 미국은 자원입대자들이 시급히 필요했다. 미국군은 영국군의 지휘에 따르며 '엉클 샘'이 그대를 원한다는 모집 포스터를 배포했다. 정부 당국은 100만 명이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6주 후 입대자 수는 겨우 8만 명뿐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들은 불과 50년 전에 끝난 남북전쟁의 고통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은 병역의무법을 도입했다. 처음엔 신병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서운 훈련 교관 외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부족한 군복, 나무로 된 모형 소총. 대포 역시 모형이었다. 반면 신병들은 길거리 싸움에 능한 경우가 많았다. 유혈사태로 진화한 국가에서 배운 기술이었다.
머지않아 진짜 전투에 투입될 병사들. 하지만 연합군의 배를 독일군이 계속 침몰시킨다면 그들은 유럽으로 갈 수 없었다.
이에 미국은 배를 무장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이동하며 구축함 호위대의 보호를 받았다. 구축함은 속도와 기동성을 위해 건조된 작은 군함으로 잠수함의 잠망경을 찾는 훈련을 받은 선원들이 탑승했다. 폭뢰로 무장한 구축함들. 폭뢰는 물속에 떨어뜨리는 폭약통으로 잠수함을 격침하거나 수면으로 끌어낼 수 있는 폭탄이었다.
특정 깊이에 이르면 터지는 폭뢰. 이는 독일 잠수함에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 호송체계로 독일군의 피해가 늘어났고 영국과 프랑스로 더 많은 물자가 공급됐다. 1917년 봄, 프랑스는 3년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슈멩 데 담이라 불리는 북부 고원지대 크라운 마을 부근에서 프랑스군은 형편없는 공격으로 큰 위기를 자초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어째서 사령부가 여러 차례 자살 공격에서도 깨달은 바가 없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2. 천군만마가 된 미국의 합류
프랑스 최고 사령관이 된 페탱장군. 그는 다른 장군들과 달리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프랑스는 군사재판으로 3,500명의 반란자가 법정에 섰다. 이 중 1,380명은 긴 징역살이를, 600명은 사형을 선고받고 57명은 처형됐다. 전쟁에 지쳐 점점 현실을 포기하는 프랑스 병사들. 그들은 불온한 말 한마디로 군법 회의에 끌려가고 모든 편지는 검열당했다.
프랑스군은 더 공격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첫 미국부대의 도착은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독일 잠수함의 위협에도 대서양을 건너온 미국 해외 파견군 사령관, 존 퍼싱 장군은 가장 먼저 배에서 내렸다.
1917년 6월 13일, 전쟁터에 도착한 퍼싱 장군을 본 프랑스인들은 그의 군인다움과 늠름한 태도에 감탄했다. 파리 시민들은 희망을 품고 그를 환영했다. 퍼싱 장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라파예트의 무덤에서 조프르 장군에게 경의를 표한 일이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자국에 도착한 미국 병사들을 엉클 샘의 의미로 샘이라 불렀고, 미국 병사들은 프랑스 병사들을 개구리라고 불렀다. 그들이 개구리 다리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포도주를 물처럼 마시던 프랑스 병사들. 고향에선 나이가 어려 술을 못 마시던 미국 청년들은 금세 포도주 맛에 빠져들었다.
미국 병사들은 어딜 가나 인기가 많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러 온 미국 병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프랑스군도 영국군처럼 미국 병사들을 프랑스군에 흡수시키길 원했지만, 퍼싱 장군은 이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새 포도주를 낡은 염소 가죽에 넣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는 동맹국들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흑인 미국 병사들을 연합군 부대에 배치했다. 흑인 병사들은 프랑스 병사들의 환대에 깜짝 놀랐다. 고향에서 노예의 후손이었던 이들은 여전히 차별과 학대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미국 병사들의 전투 기술을 키워주러 온 영국과 프랑스의 교관들은 미국군의 훈련이 수준 미달이라 여겼다. 미국 병사를 진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장비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은 아직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지 못했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대포 2,500문과 포탄 1,100만 발, 기관총 50,000정, 총알 2억 개, 비행기 4,500대, 탱크 235대를 구입해야 했다. 회선 포대를 장착한 최초의 장갑차인 이 혁신적인 탱크는 퍼싱 장군이 펼치고자 하는 기동전의 핵심 장비였다. 미국은 엄청난 구매자금 조달을 위해 막대한 채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은 관객들에게 자유 채권을 사라고 홍보했다.
프랑스 역시 만국의 시민들이 독일 황제를 굴복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으니 전쟁 채권을 사라고 끊임없이 부추겼다. 특히 영화 관람객들은 자주 표적이 됐다. 화면에서 한 병사가 직접 관객을 부르면 스크린 뒤에서 "신청하세요!"라는 말을 외쳤다.
전쟁 비용은 1914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르노, 포드, 크루, 시트로엥과 같은 기업들은 점점 부자가 됐다. 파리 15구역에 위치한 시트로엥의 공장들은 2,600만 발의 포탄을 찍어냈다. 열악한 작업장과 지독한 소음 속에서 저임금을 받는 여성들이 일요일을 포함해 무려 하루에 11시간씩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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