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세를 주도한 유관순
1908년, 의병들의 투쟁이 극에 달했을 때 의병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경성감옥. 1923년, 독립투쟁이 더욱 뜨거워지자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꾸고 감옥의 크기를 확장했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 원형 감옥이 실제로 반영된 서대문 형무소는, 이렇게 한 자리에서 세 군데의 복도를 감시하여 수감자들이 끊임없이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이곳을 열면 감옥의 내부를 다 감시할 수 있었고, 안에서는 밖을 보이지 않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5명이 정원인 이 좁은 방에 35명을 수용하면서 사람이 지내기 죽을 만큼 힘든 곳이었다. 1920년 3월 1일, 바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한 소녀의 절규에 맺힌 선창을 시작으로, 교도소 전체는 3,000여 명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뒤덮였다.
1902년, 3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유관순은 14살의 나이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하여 1919년 고등부로 진학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 최대의 시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등과 1년생 유관순은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연이어 3월 5일, 서울 만세 시위에도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0일, 두려움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반포했으나, 그럴수록 수많은 학생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을 외쳤고, 무수히 체포되었다.
"독립 만세를 부르자는 생각은 어디서 났는가?"
"누가 이런 생각을 너의 머릿속에 집어넣어 주었나?"
"주동자는 누구인가?"
왜 우리가 선생님 조종을 받지 않고는 못 나온단 말이에요?
조선 사람은 삼척동자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
우리는 벌써 14, 15세의 장성한 처녀들이에요
- 목포 정명 여학교 재학생 김정애(당시 14세)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은 교회와 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 운동 상황을 설명했고 천안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2. 체포 후에도 당당했던 유관순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 수천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맹렬한 독립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유관순의 부·모는 모두 독립 만세운동 현장에서 조선총독부 군사경찰의 총에 맞아 살해당했고, 현장에서 만세 시위주동자로 체포된 유관순은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 다른 감옥으로 옮겨져 고문받았으나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죄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이 당당히 재판관들에게 한 말,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왜 제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느냐?
왜 평화적으로 아무런 무기를 갖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해대어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하여 무고한 수많은 목숨을 저리도 무참하게 빼앗을 수 있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으며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식민지 지배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다. 무슨 권리로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나는 죄인이 아니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그 순간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만세를 부를 것이오. 나는 대한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당신들이 나를 죄인으로 몰고 있을 뿐이오 나는 도둑을 몰아내려 했을 뿐이오. 당신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았는데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6월 30일 징역 3년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쓰는 '징역살이'는 처벌의 의미인 징(懲)+노역의 의미인 역(役)이 합쳐진 말로 일제강점기로부터 유래된 것이기도 하다.
서대문형무소로 옮긴 유관순, 여옥사 8호의 비좁은 방에서 6명의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고초를 받았다. 함께 8호 방에서 지냈던, 기생 김향화는 3.1운동이 신분과 직업, 계층을 뛰어넘어 남녀노소가 모두 함께한 민족운동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함께 수감된 구세군 사령 부인 임명애는 1919년 11월에 출산하여 아기와 함께 수감생활을 하였다. 한겨울 엄동설한 추위에 난방도 되지 않는 곳에서 기저귀가 얼어붙는 등 아이를 키우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상황 속에서, 유관순은 산모에게 자기 밥을 덜어주고, 오줌 싼 기저귀를 손으로 짜 허리에 감싸 체온으로 말려주는 등 당당하게 생활했다.
3. 감옥을 가득 메운 유관순의 목소리
1920년 3월 1일, 여옥사 8번 방 수감자 1933번의 목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대한독립만세!" 감옥 안의 한 개의 목소리는 3,000개의 목소리가 되어 들불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나이 열여덟, 틈만 나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그 소녀는 결국 지옥이라는 표현이 사치스러운 지하 독방에 갇혔고 고문을 받게 되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이 결혼하며 특사로 형이 1년 6개월로 감형, 재판 전 구금상태였던 3개월이 빠져 총 형량은 1년 3개월이 되었다. 출소를 약 5개월만 남겨 둔 유관순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여전히 독립 만세를 외쳤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했다. 유관순이 마지막으로 친오빠를 봤을 때 했던 말, "오빠 내가 곧 죽을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할 일은 했다고 생각해요."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출소 이틀을 남겼던 소녀 유관순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사망 원인,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 '할 일을 했던' 소녀의 '대한독립만세'를 울부짖는 목소리는 더 이상 감옥에서 울려 퍼지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것을 잊고 산다. 102년 전 , 한 소녀의 목소리를 영원히 듣지 못했던 날이고, 오늘 여전히 수많은 것을 잊고 사는 날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그 순간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만세를 부를 것이오.
-당시 17세,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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