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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39

1차 세계대전_몰락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1. 무너지기 시작하는 오스트리아군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카포레토를 장악했다. 10일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무려 100km를 진군했다. 1917년 11월 초,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군대의 잔해 사이를 지나갔다. 결국 27만 5천 명의 이탈리아 병사들은 굴복했다. 이탈리아 병사들은 외쳤다. "우리의 적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카도르나 장군이다!" 카도르나 장군은 말했다. "나의 군대는 파업에 돌입했다." 그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카포레토에서의 패배로 반란의 분위기가 퍼지자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철수할 것을 우려한 연합군의 지도자들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1917년 11월 15일, 그들은 원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원군은 구세주로 추앙받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로 진.. 2022. 11. 29.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안창호 1. 결국 체포된 안창호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 울린 굉음. 소리의 진원지는 매헌 윤봉길의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날 오후, 도산의 체포 소식이 들려왔다. 일제는 윤봉길의 의거 배후세력 소탕을 빌미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고, 원래부터 전범국의 경찰에 쫓기던 그 순간에도 도산은 16살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두의 만류에도 이유필 선생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아들에게 소년 동맹 체육대회 지원금 5원을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이유필은 사람을 시켜 안창호의 숙소로 찾아가 위험을 알리라고 했으나, 얄궂은 운명은 두 사람의 길을 엇갈리게 했다. 도피할 시간이 있었지만, 약속의 무게를 신념으로 알던 안창호 선생은 결국 소년을 만났고, 이미 조계를 둘러싸고 있었던 전범국 형사들과 .. 2022. 11. 27.
독립을 향한 안창호의 열망과 리더십 1. 임시정부를 위한 안창호의 노력 임시정부의 대표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는 새로운 대안을 추진했다. 전 국민의 의견을 결집해 독립운동의 방략을 고쳐 세우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한 것.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의 역할을 하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도산은 더 큰 규모의 국민 의지를 모을 수 있는 국민대표 회의를 통해 임시정부를 보강하고자 했다. 남의 나라 땅에 모여 조국의 운명을 의논하는 일은 산 넘어 산이었고, 비용 마련과 교통 문제 등으로 네 번이나 연기되며 2년의 준비기간을 가진 끝에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다. 민족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국내 13도 대표들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멕시코까지 국내외를 대표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라 안팎 135.. 2022. 11. 26.
안창호의 노력과 임시정부의 위기 1.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 "우리의 혁명은 민족혁명이외다!" 1919년 3·1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마침내 독립운동을 전개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해 5월 25일 상해를 찾았다. 1842년 난징조약 결과 일찍 개항한 상해는 그 무렵 중국의 경제 중심지이자 아시아 최고의 자유 무역항으로 성장해 있었다. 열강들이 설치한 조계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조계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산 안창호가 도착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 청사는 안창호가 미주 교포들에게 모금해 온 자금으로 마련됐고, 곧 정부의 외형을 갖추었다. 3·1운동 이후 억눌렸던 민족의 욕구가 다시 끓어오르자 국내·외 .. 2022.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