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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39

조국의 독립 마스터플랜을 세운 안창호 1. 독립을 위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안창호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가로 돌아와 사무실을 얻은 안창호는 친목회에서 발전된 공립협회를 조직했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의 경험으로 안창호는 뜻을 같이하는 임준기, 정재관, 송석준, 이강과 함께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공립협회 초대 회장에 선임됐다. 안창호는 첫 사업으로 한 달에 두 번씩 편집하고 인쇄하는 공립신보를 발행, 구국 언론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한인 이주민들은 공립 신문을 통해 일자리 등의 정보를 교류하며 한인타운의 구심체로 성장했고, 공립신보는 미주를 물론 국내, 만주, 러시아까지 배포됐다. 그 당시엔 '윤독(돌려 보는 풍습)'이 있어 신문 한 부가 들어갔다는 것은 그 일대의 지식인들이 모두 본다는 의미였다. 공립신보는 사실상 들어.. 2022. 11. 25.
도산 안창호가 미국으로 떠난 이유 1. 토론회의 스타, 안창호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묻노니 오늘 대한의 주인 되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빛을 잃은 민족에게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외치며 평생을 도전했고 거듭 실패하며 좌절했던 한 사람. 그리하여 영원한 청년이고자 했던 한 사람. 도산, 당신의 의미는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 어떻게 다가와야 할까. 구한말 개화와 선교의 요람이며 서양 외교의 각축장이자 새로운 문화의 산실이었던 서울 정동. 1894년, 평양에서 상경한 16살 안창호는 정동 거리에서 미국인 선교사 밀러를 만나고, 언더우드 사랑채에서 시작된 고아 학교에 입학했다. 안창호는 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일꾼들을 모아 그들에게 평양의 열정과 힘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선교사 밀러의 .. 2022. 11. 25.
윤봉길의 희생과 임시정부 지원 재개 1. 독립을 위해 희생을 결심한 윤봉길 만주 전쟁과 상하이 사변의 승리에 도취했던 전범국.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릴 일왕의 생일연회와 전승 축하 행사.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그 행사에서 참석자가 준비해야 했었던 것, '도시락'. 소식을 듣고 유독 눈빛을 빛내던 사내가 일왕의 생일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던 전범국 국가, 그리고 그 순간 날아든 폭탄.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전범국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24세 청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청년이 던진 폭탄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었다. 대한독립을 꿈꾸는 농촌 계몽가였던 윤봉길. 19세부터 야학당 운영, 농민 독본 저술, 부흥원 설립, 월진회 조직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지만.. 2022. 11. 23.
유관순, 만세를 주도했던 소녀 1. 만세를 주도한 유관순 1908년, 의병들의 투쟁이 극에 달했을 때 의병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경성감옥. 1923년, 독립투쟁이 더욱 뜨거워지자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꾸고 감옥의 크기를 확장했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 원형 감옥이 실제로 반영된 서대문 형무소는, 이렇게 한 자리에서 세 군데의 복도를 감시하여 수감자들이 끊임없이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이곳을 열면 감옥의 내부를 다 감시할 수 있었고, 안에서는 밖을 보이지 않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5명이 정원인 이 좁은 방에 35명을 수용하면서 사람이 지내기 죽을 만큼 힘든 곳이었다. 1920년 3월 1일, 바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한 소녀의 절규에 맺힌 선창을 시작으로, 교도소 전체는 3,000여 명의 '대.. 2022.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