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과 맞서는 프랑스
이 상황에서 프랑스 식민지 군대가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부대들은 프랑스 남부에 상륙한 뒤 북쪽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무거운 군화 대신 맨발로 행군했다. 파리 전역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방위군이 조직됐고 1914년 9월 2일, 프랑스 조종사 2명이 적진 정찰 비행에서 돌아왔다.
"독일군이 방향을 바꾸고 있습니다!"
파리로 진군하던 독일군은 방향을 틀어 프랑스군을 포위하려 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마른강에서 자신들을 공격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파리 방위군 사령관 갈리에니 장군은 마른강으로 6천 명의 병사를 긴급히 이동시켰다. 그들은 파리의 택시로 이동했다. 100만 프랑스군 중 병력은 극히 일부만 이동됐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 장군은 전선으로 가기 전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지령을 읽어주도록 했다.
"이제 곧 시작될 전투에 프랑스의 운명이 달려있다. 후퇴보다는 죽음을 택해야 한다. 나약한 모습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후퇴하면 아군에게 처형당하고 진군하면 적군에게 사살될 프랑스군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프랑스 포병부대는 놀라운 위력을 자랑했고, 하루에 200만 개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이는 여성들이 끔찍한 환경에서 일하며 만든 포탄이었다. 1914년 9월 9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승리를 거뒀다. 처참한 규모의 학살이 일어난 뒤였다. 하지만 이 전투로 프랑스군 20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 수에도 군과 정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 장군은 식민지 군에 훈장을 수여했다.
프랑스군에게 잠시 휴식이 허락됐다.
2. 연합군의 선전
하지만 젊은 기병대 장교 르네 샹은 "마른강 전투, 우린 이겼으나 승리를 잃었다"라고 평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독일군이 '바다로의 경주'라 불리는 우회 기동작전을 통해 프랑스 북부지역으로 달아나는 것을 내버려 뒀다. 세 달간의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다른 독일군 부대는 벨기에 정복을 끝마쳤다. 독일군은 지역주민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병사들을 먹이기 위한 약탈로 벨기에 시민들은 금세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 독일 병사 중엔 독일 육군에 입대한 무명의 오스트리아 화가가 있었다. 당시 25세였던 그의 이름, 아돌프 히틀러. 그는 프랑스 플랑드르에서 겪은 지옥 같은 전투를 평생 기억하며 저서에 이렇게 남겼다. "전투에 대한 자긍심은 곧 악몽으로 바뀌었다"
4년 동안 영국군은 벨기에 도시 이프르 주변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벨기에의 이 작은 지역을 연합군은 계속 지켜야 했다. 이프르, 영국군의 북부지역 마지막 요새. 이곳에선 이미 수천 명의 캐나다군이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군은 병력을 채우기 위해 잉글랜드 남부에서 더 많은 병사들을 양성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캐나다인들이 전원 자원입대하여 똑같은 군복을 입고 영국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프랑스 여러 항구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전선으로 행진한다. 웃음을 머금고 도착한 캐나다군. 이들은 과연 전쟁 준비가 됐을까.
독일군의 공세를 막은 연합군. 프랑스의 항구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자신 있게 전선으로 행진했다. 독일군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모른 채.
3. 끊임없는 독일의 공격
1914년 10월, 독일군은 정복한 지역을 사수하기로 했다. 민간인들을 동원해 플랑드르 습지대에서 방어시설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플랑드르를 침수시키기 위해 수로를 열어놨고, 무거운 진흙은 계속 물에 잠겼다.
독일군은 이곳을 지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했다. 독일군의 맞은편에서 영국군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들은 교착상태가 된 플랑드르 전선을 사수할 준비를 했다. 이동 전쟁 양상을 띠던 전쟁은 곧 진지 전쟁으로 바뀌었다.
프랑스군 사령부는 방어를 위해 구축된 참호에서 병사들이 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장교들의 머릿속엔 오로지 공격뿐이었다. 이들은 프랑스령을 장악한 독일군을 반드시 몰아내야 했다.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700km긴 참호대열이 이 지역을 가로막고 있었다.
1914년 겨울, 조프르 장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지만, 독일의 기관총 앞에 멈추어 섰다. 러시아 전선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단행한 공격은 10만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끝났다. 2만 명의 죽음으로 가진 것이라곤 어느 이름 없는 산에 쓸쓸한 봉우리뿐이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세상을 향해 외쳤다.
"이 전쟁은 유럽의 자살 행위입니다. 파괴와 학살이 한없이 행해지고 매일 뜨거운 피가 땅에 쏟아집니다. 이 비상식적인 범죄를 바라보며 거듭 호소합니다. 선량한 사람들에게 지구의 평화를"
교황의 외침처럼 실제로 전선에서는 이 희귀한 사진처럼 자연스러운 친목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 병사들은 반역죄로 총살당할 위험도 감수했다. 앞날은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이들의 친목 분위기도 금방 억압당했다.
장군들은 눈과 귀를 모두 닫았다. 전쟁 초반, 힘이 막강했던 군대는 정치와 정치인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고,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나도 분쟁은 계속 확산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영국, 벨기에군은 독일 식민지인 토고, 카메룬, 탕가니카, 르완다, 나미비아를 공격했다.
이들의 목표는 식민지 제국을 확장하고 전시산업에 필요한 원자재를 조달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은 위풍당당한 군복과 값비싼 보수에 유혹됐다. 아프리카인 10만 명과 유럽인 3만 명은 아프리카에서 격렬한 전투와 온갖 질병에 희생돼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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