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시아를 상대하는 독일
1933년 8월 27일, 동프로이센.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멘 괴링이 타넨베르크 전투 기념비 앞에서 육군 원수 힌덴부르크에게 경의를 표한다.
히틀러는 선언했다. "타넨베르크는 상징이다. 1914년 바로 이곳에서 독일의 운명이 결정됐다" 힌덴부르크에게 있어 타넨베르크 전투는 인생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타넨베르크 전투, 1차 세계대전의 변곡점이었다.
수백만 명의 청년들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가원수들은 이 전쟁이 짧게 끝날 것이라 여러 차례 약속했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태에 이르고 공포는 점점 극대화됐다. 그 공포는 프랑스를 점령했다. 독일군이 파리로 진군해오자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은행에 몰려들었다.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 상파뉴 지방의 난민 수천 명은 피난길에 오르며 삶의 터전을 떠났다.
러시아군이 공격한 독일 동프로이센에서도 공포가 엄습했다. 러시아 장군들은 새로운 전선을 열어 프랑스 동맹군이 받은 압박을 덜어주었다. 스팀롤러라 불리는 러시아군은 두 제국군을 합쳐 40만이 된 병력으로 베를린을 위협했다. 전제군주와 종교에 억압받는 러시아의 병사들은 조국에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 떠나는 병사들은 왜 수백 km를 행군하고 국경을 넘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부분 소작농이었고, 글을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었다.
1914년 8월 20일, 동프로이센을 거쳐 진격하는 러시아군은 말 그대로 거침없었다. 러시아군의 공세에 독일 8군은 수천 명의 민간인과 함께 후퇴했다. 67살의 힌덴부르크 장군이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독일군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장군과 빌헬름 2세의 면담을 촬영했다.
힌덴부르크는 벨기에 작전으로 칭송받았던 루덴도르프 장군의 지지를 받았다. 이 두사람에 의해 독일군은 그럴싸한 팀이 만들어졌다. 힌덴부르크는 이를 '행복한 결혼'이라고 표현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군의 수적인 열세를 알고 있었다. 독일군 병력은 20만 명으로 러시아군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우수한 무기와 전략적 철도수송으로 군대를 효율적으로 이동시켰다.
독일군의 사기는 높았다. 많은 병사가 동프로이센 출신으로 자기 고향을 지키고자 했다. 루덴도르프는 제플린 백작의 비행선을 배치했다. 그는 거대한 이 수소 비행선으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2. 독일의 역습
독일군은 이때 바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전송했다. 바로 러시아의 양쪽 군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정보였다. 독일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삼소노프 장군의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타넨베르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에게 9만 명이 포로로 잡혔고, 3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러시아의 삼소노프 장군은 부하들에게 "폐하께서 나를 믿어주셨는데 어떻게 폐하를 뵐 것인가!"라고 말한 뒤 총으로 자기 머리를 쐈다. 러시아군은 차례로 섬멸됐다. 이에 따라 큰 타격을 입은 동맹국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은폐하려 했다. 동프로이센에 살던 독일 난민들이 마을로 돌아왔지만 집은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난민들의 불행함은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독일군은 떨어진 사기를 올리기 위해 생존 병사들이 식량 배급을 세 배로 받는 모습을 촬영했다. 그들의 전우 1만 명이 이미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뒤였다.
힌덴부르크는 육군 원수로 임명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지만 승리의 진짜 주역이었던 루덴도르크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군 사령부에서는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자작나무 숲에 설치한 특수위장 열차에서 자기 숙부이자 러시아군 총사령관인 니콜라이 대공을 만난다. 니콜라이 대공은 타넨베르크에서의 패배를 깎아내렸다.
그는 "전쟁은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됐다. 베를린으로 가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진짜 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러시아군은 이때 오스트리아 영토인 갈리치아와 렘베르크를 정복하려 했다. 카자흐스탄 기병대가 200km를 진군해왔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죽거나 다쳤고 포로로 끌려갔다. 전쟁 포로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표적인 슬라브 민족들로 체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보스니아 인이었다.
러시아의 선전영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포로와 러시아 병사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모든 슬라브족을 제국에 통합시키겠다는 러시아의 욕망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군에 첫 승리를 거둔 니콜라이 2세의 만족스러운 미소 뒤에는 3주간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러시아 병사들이 있었다.
600km 길이의 전선에서 독일의 7개 군대가 200만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리고 폰 클루크 장군의 1군이 프랑스의 솜강을 건넜다.
1914년 9월 1일, 독일 장교들은 병사 앞에서 외쳤다.
"승리가 머지않았다. 영광의 파리 입성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독일군 보병들은 1914년 8월 초 벨기에에서의 격전 이후 지금까지 400km를 행군했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전투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들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무더위에 한 달 동안 군화를 벗거나 씻어본 병사는 없었다.
영국군 역시 후퇴를 거듭했다. 8월 13일 프랑스에 도착한 영국군은 300km를 행군해온 뒤 영국 해외파견군 총사령관인 육군 원수 존 프렌치에게 전쟁 소식을 들었다.
"상황이 매우 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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